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근원에 대한 그리움, 소설 「혼불」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2-16 12:07
조회
2707


「혼불」에는 환한 가을 녘에 종이꽃 휘날리며 가던, 환장하게 아름답고 구슬픈 상여와 상여소리도 가슴 절절히 새겨 있다. 잊고 지내온 아득한 일들.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나서던 나들이에서 마주친 시골길, 풀 한포기, 밟던 흙의 질감 등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 「혼불」을 쓰게 했고, 외할머니의 궁체 두루마리 편지와 할아버지의 고색창연한 문집 등을 접하며 종이와 글씨에 대한 남다른 친화력을 가지게 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외할머니의 궁체 두루마리 편지와 할아버지의 고색창연한 문집이며 수놓은 골무 한 개, 빛바랜 종이 한 장에서도 조상들의 육화된 숨결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방대하고 정밀한 자료가 필요했는데 무수히 많은 문헌과 현장, 전문가와 옛 어른들을 찾아다녔어요. 강모의 중국 생활을 담기 위해 93년 여름 북경에서 심양, 연길을 거쳐 목단강에 이르는 64일의 취재 여행을 하기도 했지요. 그곳에서 기적같이 한 조선족 노인을 만나 그로부터 1940년대 서탑거리의 모습을 전해들을 수 있었답니다. ∥『시사전북』 1997년 6월호 <전북의 작가 최명희>

「혼불」을 쓴 가장 중요한 바탕은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는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의 공간에 구체적인 존재로 생물학적 생명체인 ‘나’를 있게 한 어머니와 아버지, 그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형제들과 그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보(世譜)의 사다리는 작가에게 설레는 상상을 일으켰다. 그 상상력의 꼭짓점에 생명을 받고 성씨를 받은 최초의 조상이 있었다.

그들의 고향을 찾곤 한 작가는 어느 해 여름, 석양의 불타는 하늘을 보았다. 몇 백 년 전 똑같은 위치에서 그 하늘을 바라보았을 입향조(入鄕祖) 할아버지의 눈빛을 섬광처럼 만났다. 조상과의 합일. 이 감동은 그 선조로부터 오늘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 산천초목, 전통적인 우리의 생활습관, 사회제도, 촌락구조, 역사, 세시풍속, 관혼상제, 통과의례, 그리고 주거의 형태와 복장과 음식이며, 가구, 그릇, 치레, 소리, 노래, 언어, 빛깔과 몸짓들을 향해 극채색으로 뻗어나갔다.

「혼불」은 연날리기나 달맞이 같은 풍속, 향약과 같은 제도, 봉천 서탑거리 등을 정밀하게 복원하면서 우리의 의식에 박혀 있는 설화들도 재해석했다. 「혼불」은 『동국세시기』나 『경도 잡지』에서 얻어야 할, 잊혀 가는 세시풍속(歲時風俗)이나 고유한 민속놀이를 등장인물의 삶에 녹아들게 해 되살려내고 있다. 여인들의 베틀가나 화전가(花煎歌) 그리고 『경도 잡지』에 나오는 설날에 치는 윷점까지 소개해 놓은 것을 보면 최명희가 얼마나 철저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액막이연 하나에도 복합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특히 연의 이마. 한지의 한가운데를 도려내어 그것을 붙이는 연의 이마는 그것 때문에 연의 이름이 결정되는 한편, 한 겹 덧대어진 이마와 뚫린 구멍으로 인하여 연은 하늘로 떠오른다. 이 ‘종이 몸’에 대한 사유와 해설은 제5권 <액막이연>에서 상세하다.
반듯하고 온전했던 하얀 백지는 그만 한순간에 가슴이 송두리째 빠져 버려 펑 뚫리고 말았다. 종이의 오장(五臟)을 무참하게 도려내 버린 것이라고나 할까. (중략) 연이야 무슨 생각이 있을까마는 그렇게 제 가슴을 아프게 도려낸 애를 곱게 곱게 물들이어 이마빼기에 붙이고. 그 어느 연보다 더 휘황한 빛깔로 자태를 자랑하며 이름까지 지어 받아, 소원을 싣고 악귀를 쫓으면서, 높고 높은 하늘의 먼 곳으로 나는 것이다. 얼마나 서럽고도 아름다운 일이리. 사람도 그러하랴. ∥『혼불(제9권)』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설화나 견훤에 대한 재해석, 사천왕상에 대한 탐구에 이르러 「혼불」은 소설로 쓴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으로 확대된다. 제9권 <아름다운 사천왕>에서 도환과 강호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사천왕 연구는 작가가 송광사·선운사·능가사를 1년 여 취재한 결과다. 특히 선운사 다문천왕 왼발에 깔려 있는 음녀에 관한 해석은 돋보인다. 나무로 깎은 그 음녀 조형에서 ‘죄의 당당함과 고적함’을 읽는다.

정설로 굳어진 승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역사도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동안 활자화된 것에 대한 인간들의 무조건적인 신뢰는 일체 반론을 허용하지 않았다.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승자편의 기록이 되어버린 『삼국사기』의 석연찮은 사실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답을 유추해 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자연과 사물들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의 그물이며 사랑과 증오, 갈등, 가족과 가문의 영고성쇠(榮枯盛衰), 그리고 여기서 생겨난 민간신앙과 속신(俗信), 종교, 관념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세계관으로 파고든 것이다.

작가는 “풍요로우나 피폐해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정서에 본질적인 고향의 불빛 한 점을 전할 수 있다면, 또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삶의 생명소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서 한 시대의 인간과 문화와 자연을 언어로 건져 나의 모국에 한 소쿠리 모국어로 가득 바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혼불」을 통해 순결한 모국어를 재생하고자 했다. 수천 년 동안 면면히 우리의 삶이 녹아서 우러난 우리의 모국어는 이미 해체 왜곡되어 그 형태마저 잃어버리고 있다. 언어란 ‘정신의 지문(指紋)’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에게 그를 사로잡는 명제는 전아하고, 흐드러지면서, 아름답고, 정확한 우리 모국어의 뼈와 살, 그리고 미묘한 우리말, 우리 혼의 무늬를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말의 씨앗으로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우리 고유의 이야기 형태를 살리면서 서구의 전래품이 아닌 이 땅의 서술방식을 소설로 형상화하여 기승전결의 줄거리 위주가 아니라, 낱낱의 단위 자체로서도 충분히 독립된 작품을 이룰 수 있는 각 장, 각 문장, 각 낱말을 그는 쓰고 싶은 것이다.
처음 집필할 때보다 ‘혼불’이 훨씬 내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마치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찰흙을 만질 때와 같은 느낌이다. 엉기고 붙들리고 서로를 놓아주지 못한 채, ‘혼불’과 나는 하나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소설 「혼불」을 내가 썼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시대와 한 가문과 거멍굴 사람들의 쓰라린 ‘혼불’들이 저희들끼리 스스로 간절하게 타올랐던 것이다. 나는 단지 그들의 오랜 원(願)과 이야기들을 대신하여 써낸 것이다. ∥『윤성』 1997년 5·6월호 <최명희의 대하예술소설 「혼불」>

최명희는 「혼불」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 있는 넋의 비밀과 그 비밀들이 서로 필연적인 관계로 작용하며 어우러지는 현상을 언어의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해 섬세하게 복원하고자 했다. 가장 앞서는 것은 ‘느낌’이다.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 자료들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자료와 사물들을 어떻게 정서화하고 감각화해서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생생하게 느끼며 만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원을 통해 참된 우리 삶의 모습과 우리 정신의 원형질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것이 작가가 「혼불」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었다.

∥글: 최기우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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