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 혼불 완독을 위한 안내서_ 「혼불」 9권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3-05-03 12:42
조회
330
혼불 9권은 호성암 암주 도환과 강호의 대화로 시작한다.

영산백(映山白) 흰 꽃이 투명한 모싯빛으로 소담스럽게 핀 암자의 뒷마당 그늘진 곳에서, 놋대야만 한 단지 뚜껑에다 연분홍 물감을 풀어 놓고, 한 장 한 장 백지를 담가 흔들며 물을 들이고 있던 호성암 암주(庵主) 스님 도환(道環)은, 인기척을 듣고 문득 고개를 돌린다.

“아니, 이분이 누구십니까.”

주르르 분홍 물이 떨어지는 한지를 양손으로 맞잡아 올리면서 도환이 반갑게 일어선다. 도환은 아직 사십이 채 안 된 모습이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바쁘시구만요.”

강호는 물들여 널어놓은 색지를 가리켜 눈짓한다.

“그늘에 말려야 빛이 안 바래거든요.”

금방 건져낸 연분홍 한지를 널판자에 펼치는 도환의 말에 강호가 웃는다. ∥ 「혼불」 9권 7쪽

안 변해야 하는 것을 말릴 때는 그늘에서 말린다. 거문고를 만드는 오동나무, 집 만들 때 쓰는 서까래 기둥목, 연등을 만들 때 쓰는 지화까지 모두 그늘에 말려야 오래 간다.

모든 것은 세월이 가면서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치 말아야 할 게 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지고지순한 마음과 자신을 지키는 신념이지 싶다. 그런 그늘 같은 마음이 총알같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고 내 삶을 지키는 방법이지 않을까. 오래 가는 것들은 그늘에서 말리듯 혼불 9권을 읽는 시간도 그늘 속에서 지나가길 바라본다.

이야기

옹구네 집에서 두 달째 기거하던 강실은 호성암 타종 소리에 어머니 오류골댁을 떠올린다. 바지런하고 정갈한 오류골댁은 호성암 타종 소리에 맞춰 일어나 정화수를 떠서 기도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니 가아아앙! 하고 울리는 타종 소리는 강실이에게 어머니를 더욱 그립게 하는 소리였다.

한편 춘복은 옹구네로부터 강실이가 차표를 끊어서 멀리 가려고 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성을 잃은 춘복은 옹구네에게 강실이를 당장 자기 집으로 데려다 놓겠다고 한다. 화가 치받친 옹구네는 춘복의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린다. 영문을 모르는 춘복에게 죽어가는 사람 살린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강실이 생각만 한다며 만약 강실이를 데려다 놓는 날에는 자기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춘복은 옹구네 서슬에 그만 아연실색한다.

강실은 마침내 떠날 것을 결심하고 옹구네에게 차표를 끊어 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간 고마웠다며 금가락지를 선물로 준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오류골댁은 강실이의 소식을 몰라 애를 태우다 그만 부엌을 태운다. 때마침 들른 효원 덕분에 큰불로 이어지지 않는다. 효원은 오류골댁에게 강실이가 안행사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친정어머니에게 이렇다 할 연락이 없다며 기응을 시켜 안행사에 가보게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한다.

인물 들여다보기: 도환

도환은 호성암 스님이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이곳 호성암까지 오게 됐는지 알 수는 없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호리호리한 몸집이다. 얼굴도 단아하고 맑은 쪽인데, 눈매만큼은 매의 눈처럼 날카롭다.

“도환이가 속가에 있었더라면 아마 한량이 되었을 게다. 그 가녈가녈한 몸에다가 꽃 만지는 솜씨 좀 봐라. 영락없지. 귀신이 감겨들게 생기잖었냐. 헌데 그가 기방이 아니라 승문으로 간 것은 오로지 그 눈 하나 때문이야.”

도환을 두고 조부 이헌의는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 「혼불」 9권 10쪽

그의 손은 여인의 손처럼 가느다랗고 곱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만든 종이꽃은 근방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다. 정성을 다해 그늘에 말린 종이를 한 장 한 장 붙여 만든 종이꽃은 사월 초파일에 쓰일 연등으로 탄생한다.

그는 지화가 생화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던 강호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화는 우주 자연의 공력이요, 지화는 인간의 정성인 것이라. 인간의 마음과 공이 저 우주 자연의 공력에 이를 만큼 지극하게 사무쳐, 무생물인 종이를 접어서 영원히 지지 않는 생명과 향기로 피워내는 것이 지화일 겝니다. 그러니 우주의 심장에 인간의 정성이 꽃피도록 염원을 다하여 만들어야 하지요. 굿당 무속에 쓰이는 꽃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의례에 쓰는 것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불전에 모시는 꽃이리요.”

비록 종이로 만든 종이꽃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어 부처님께 바치면 그 뜻이 닿을 것이라는 뜻이다. 무엇이든 정성을 기울이면 뜻이 닿아 마침내 소원을 이룰 수 있다. 그걸 알기에 도환은 신자들의 바람을 담을 지화 한 장 한 장에 공력을 쏟아붓지 않을 수 없다.

“사천왕을 단 한 번이라도 가까이에서 꼼꼼히, 정성스럽게 바라본 일이 있으신가요?” ∥ 「혼불」 9권 57쪽

도환의 질문에 강호는 어릴 적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을 통과하지 않고 지나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사천왕상의 생김새가 워낙 무서운 탓이다. 도환은 빙긋이 웃으며 사천왕상 이야기를 강호에게 들려준다. 강호는 도환의 이야기에 마음을 혹 빼앗기고 만다. 악귀가 아닐까 싶었던 사천왕상이 인간 세계를 지키는 수호신이었음을 알고 얕은 지식과 섣부른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외에 들여다볼 이야기: 사천왕상

혼불 9권의 압도적 캐릭터가 있다면 사천왕상이지 싶다. 사천왕상은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는 천사다. 인간이 죽어서 가는 욕계의 동, 남, 서, 북의 네 귀퉁이를 지키는 존재들이다.

“아, 그런데, 스님. 각 존위의 방위 서신 위치가 동 · 서 · 남 · 북이 아니고, 동 · 남 · 서 · 북으로 되어 있습니까?”

“예. 이 세상의 방위를 둥그렇게 본 것입니다. 동 · 서 · 남 · 북이 방위를 서로 반대 개념, 즉 대칭으로 짚은 것이라면 동 · 남 · 서 · 북은 원으로 짚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동 · 남 · 서 · 북으로 방위를 보면 해가 뜬다, 해가 진다, 춥다, 덥다, 밝다, 어둡다, 이런 식으로 분류하고 나누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동 · 남 · 서 · 북 방위는 해뜨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해가 점점 길고 밝아지는 남쪽으로 이동하고, 다음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갑니다. 그러고 나면 밤이 오지요. 북방입니다. 그리고 북방은 동방과 나란히 있지요. 어둠이 고요히 우주와 만물을 품어 주면 이윽고 해뜨는 아침이 옵니다. 그래서 동 · 남 · 서 · 북으로 이동하는 것은 우주의 자연이 주는 생체 방위의 평화와 순리가 있지요. 우리의 몸에 맞는 방위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이 방위에는, 모든 것이 옆에 있고 동등하며 끝없이 순환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혼불」 9권 66쪽

사천왕은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이 있다. 그들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데 동방지국천왕은 푸른 검을, 남방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서방광목천왕은 탑과 당을, 북방다문천왕은 비파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표정 또한 주목할 만하다. 네 사천왕상의 눈은 퉁방울 같고 하얀 얼굴에 수염이 길게 자라 있다. 얼굴 또한 우락부락하다. 언뜻 보면 무서운 인상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일부러 겁을 주려고 애쓰는 듯한 표정이 귀엽다.

이들이 입은 옷도 예사롭지 않다. 마치 선녀의 옷처럼 차르르하니 주름이 멋스럽고 푸른 띠를 둘러서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다. 머리에 쓴 관은 화관처럼 아름답고, 고혹하다.

작가가 사천왕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혼불 9권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9권의 대부분이 사천왕상과 관련된 걸 보면 말이다. 작가는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방패연을 만들 때 동그랗게 도려내는 종이에도 연민을 가진 세심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에 자세히 기술한 이유가 단지 그것에 관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전하고자 한 게 아닌가 싶다. 작가의 생전 강연에 그 바람이 그대로 드러났다.

금강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사찰에다 금강문과 천왕문을 중문으로 세워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봉안하는 까닭은, 청정한 도량에 사악한 악귀가 끼여들지 못하게 엄중히 외호하며, 절에 오는 사람들의 방일한 마음을 신성 엄숙하게 가다듬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 「혼불」 9권 80쪽

혼불 9권을 읽고 난 독자의 발길이 저절로 천왕문으로 옮겨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그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임을 자명한다. 사천왕상 하나하나의 이름과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의 의미 그리고 사천왕상이 왜 그곳이 있는 것임을 다시 되새기며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의 의미를 짚어 보면 좋겠다.

※ 글쓴이: 김근혜(동화작가)_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동화)로 등단, 『제롬랜드의 비밀』『나는 나야!』『유령이 된 소년』『봉주르 요리교실 실종사전』『다짜고짜 맹탐정』등을 냈다. 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2021년∼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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