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해원’을 향한 끝없는 이끌림, 소설 「혼불」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2-16 11:57
조회
2003


소설 「혼불」은 서걱거리는 대나무들의 일렁거림으로 시작된다.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혼불(제1권)』

「혼불」은 암울하고 어두운 1930년대, 국권을 잃었지만 여전히 조선말의 정신구조와 문화를 지탱하고 있던 이중적 시대에서 처참하게 부서지고, 상처받고, 뒤집히고, 고뇌하며, 한없이 몸부림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전라도 남원의 한 유서 깊은 문중인 매안 이 씨 가문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며 치열하게 몸을 일으키는 종부 3대(청암부인·율촌댁·효원)를 중심으로, 남성성이 거세된 강모와 같은 남성들과 그들로 하여금 사회적 남성성을 잃게 만든 식민지 상황,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전통적 삶의 방식을 당당하게 지켜나갔던 양반사회의 기품이 그려진다. 평민·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러운 세상을 살다간 거멍굴 사람들의 농도 짙은 삶은 매안 이 씨들의 삶과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전주와 남원이 중심이었던 소설의 무대는 이후 만주로 확장되어 그곳 조선 사람들의 비극적 삶과 상실한 남성성 그리고 강탈당한 민족혼의 회복을 위한 모습들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최명희는 “「혼불」은 내가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자주 말했다.
이 글은 제가 쓴 것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아득한 개국의 시원에 웅녀 할머니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이 땅 조상들의 말 없는 한숨, 괴로움, 아픔, 그들이 나서 살고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저절로 와서 한 자씩 수놓여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소설은 이미 제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거대한 강물로 저를 붙잡고 있어서 작중의 인물들이 토해내는 많은 이야기를 주워 담는 것만이 제 역할이었어요. ∥『필』 1997년 1월호 <대하소설 「혼불」을 17년 만에 완성한 작가 최명희>

「혼불」 1·2부를 엮은 1990년, 책 말미에 쓴 <작가의 말>에도 그는 ‘「혼불」은 그 주인공들과 거기에 나온 모든 자연물들과 사물들, 의례들이 스스로 자기가 필요한 곳에서 불타올랐다.’고 썼다. 그의 말처럼 이 작품은 알 수 없는 염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청암부인 상중(喪中)에 강실이가 마당에서 박모(薄暮)를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그 한 예다. 해가 진 뒤 어스레한 동안의 끝에서 강실은, ‘떳떳하지 못한 소원’인 강모를 애절하게 기다린다.


시리게 흰 옥양목에는 희다 못한 푸른빛이 어리듯이, 어스름도 겨우면 드디어 온몸에 형광(螢光)의 인(燐)이 푸르게 돋아나는 것일까, 그 청린(靑燐)은 아주 잠시, 어스름과 어둠의 경계에서 얼비친다. ∥『혼불(제4권)』

작가는 동짓날 저녁 저무는 하늘을 그리기 위해 사흘 동안 창밖의 공기를 노려보았다고 말했다. 소설 속 효원이 청암부인의 혼불을 흡월하듯 작가는 박모를 ‘흡월’ 했다. 흡월은 교감의 한 극지. 공기의 정령이 자신을 휘감으며 밀려들었다. 마침내 공기의 기운을 잡아낸 작가는 전율했다. 그 놀라운 경험은 최명희 문체의 절정이라고 불리는 제4권 <박모>를 쓰게 했다. 달의 음기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흡월이 곧 최명희가 글을 대하는 자세였다.

최명희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영매(靈媒)의 전율적인 힘으로 이들의 존재를 흡월했다. 존재를 복원하고, 새롭게 탄생시켰다.

어느 고문서에서 노비의 이름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존재를 사무치게 체감한 작가는 그 이름 모두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제4권 <귀천>에 풀어놓았다. 작가는 그들의 존재를 해원시켜 ‘어둡고 억눌린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꺼져가는 혼불을 환하게 지펴 올린 해원(解寃)의 한마당’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이 '魂불'의 자료를 수집하고, 구상, 구성, 준비한 시간을 빼고, 원고지에 첫 줄을 쓰기 시작한 것이 1980년 봄, 4월이었으니 지금까지 만 15년 6개월이 흘러 달수로 18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월간 시사종합지 『신동아』에 제2부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9월호부터였는데 만 7년 2개월간 집필하고 마침 이번 10월호를 끝으로 마감했습니다. 그러면 소설이 끝났는가, 생각하겠지만 '끝'이 아니고, 먼 길을 가는데 신호등이 바뀌는 네 길거리에 잠시 멈추어 선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제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멀리 가야 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엄청난 자석의 강물 같은 이 흐름은 깊고 큰 힘으로 저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흐름 위에 저의 사랑과 슬픔과 그리움, 절망, 그리고 모든 부르고 싶은 것들을 띄웁니다. 그리고 내가 만난 모든 이야기를 띄우고 싶습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후와 풍토, 세시풍속, 사회제도, 촌락구조, 씨족, 역사, 관혼상제, 통과의례, 주거형태, 가구, 그릇, 소리, 빛과 향기, 달빛, 어둠을 빨아들여 흐르는 강물이 되기를 저는 감히 이 소설에 원하였습니다. ∥「나의 혼 나의 문학」(1995년 미국 뉴욕주립대 강연록) 중에서

「혼불」은 ‘한국인의 생활사와 풍속사, 의례와 속신의 백과사전’이며, ‘우리 문화전승의 전범(典範)’이라 일컫는다. 민속학, 국어학, 역사학, 판소리 분야의 학자들도 「혼불」에 ‘민족사의 숨겨진 변방을 복원해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호남의 관혼상제 의식, 정월 대보름 등 전래 풍속들에 대한 묘사는 현미경을 들이댄 듯 정밀하고, 결고운 언어로 생생하게 구사된 남원 지역 사투리는 구수하고 정겹다. 완벽한 저작을 위한 작가의 노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질긴 투혼이 빚어낸 역작. 방대한 자료 조사와 수집을 병행했고, 흡족할 만큼 고증이 되지 않으면 한 줄도 쓰지 못했다. 17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소요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혼불」을 집필하던 17년의 세월 동안 가슴에 쌓이고, 뭉치고 어우러진 평범한 사람들의 그저 그런 이야기, 깊고 낮은 한숨 소리와 같은 이야기들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불덩이를 이뤄, 결국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 나갔다. 그래서 「혼불」은 스스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가 스스로 불타오르는 그 숱한 존재들의 해원의 바다다.

∥글: 최기우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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