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언어는 정신의 지문, 소설가 최명희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2-16 11:36
조회
1090


"한국 혼을 일깨우는 이 땅 문학사의 영원한 기념비"로 꼽히는 장편소설 「혼불」. 그 작품 하나만을 고집하며 “「혼불」을 통해 우리말에 깃들인 우리 혼의 무늬를 복원하고 싶었다.”는 작가 최명희. 작가란 무엇이며 누구인가? 이 질문을 되새길 때 가장 뚜렷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최명희다. 그 스스로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라 했기에, 그 흔한 컴퓨터 키보드 한번 두드리지 않고 원고지의 칸을 꼬박꼬박 채워갔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걸려 원고지 한 장, 또 어떤 날은 서너 장…. 그는 쇠잔해진 육신으로 마치 혼절하듯 새벽녘에야 잠이 들곤 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원고지 1만 2,000장. 그는 언젠가 “원고지의 칸이 너무 깊어 토씨 하나만 틀려도 다시 쓰기를 반복해 10여 장의 파지를 만들곤 했다.”고 고백했다.
“가장 한국적인 말의 씨앗으로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우리식 고유의 이야기 형태를 살리면서 서구 전래품이 아닌 이 땅의 서술방식을 소설로 형상화하여, 기승전결의 줄거리 위주가 아니라, 낱낱이 한 단락만으로도 충분히 독립된 작품을 이룰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여성동아 1998년도 1월호 중에서

소설가 최일남은 「혼불」을 두고 “미싱으로 박아댄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이바구”라고 감탄했으며, 한 원로시인은 “정교하게 만든 정신의 끝에 피를 묻혀가며 새긴 처절한 기호”라고 몸서리쳤다. 이렇게 그가 쓴 원고지의 칸칸이 그의 혼이 불꽃처럼 피어났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일찍 세상을 등졌다.

최명희는 1997년 9월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창립총회에서 “17년 전 봄, 「혼불」의 첫 줄을 쓸 당시 저는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만이라도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본다면 이 길을 끝내 가리라고 다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 1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나의 작품에만 쏟아 붓는 투철한 작가 정신을 통해 예술혼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준 작가 최명희.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혼불을 지키고 쓰다듬어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낸 그이기에, 그의 유지를 잇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 작가 최명희를 생각하고, 소설 「혼불」을 펼치는 우리의 손길이 한 증거일 것이다.
“무릇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우리는 과연 이 시대의 시간 위에 어떤 지문을 찍는 것일까. 그 무늬는 후손의 얼굴에 덮인다.”

그가 남긴 한 문장이 오늘도 가슴에 아리고, 마음에 어린다.
소설 만들기에 대한 최명희의 <혼불>같은 투신의 결정이 곧 「혼불」이다. 만 17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린 신들림과 각고의 세월이 그렇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이런 표현에 엄밀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가 묘사한 우리 삶의 진짜배기 원형질이 슬프고 아름답게 차근차근 다가온다. 이 소설의 특기할 만한 미덕은 바로 이 점에 있는 듯하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의 의식(리추얼)이나 그 사이에 낀 여러 풍속사의 극채색에 가까운 묘사는 놀랍다. 그 속에 포괄된 의미들이 한국인의 생활을 규정하는 것인지. 우리네 정신의 본향이 그걸 요구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면서, 어떻든 먼 회상여행을 거쳐 오늘의 나를 탐색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아, 이런 소설도 있구나 싶고 이건 미싱으로 박은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이바구'라는 걸 새삼 느낀다. ∥최일남(소설가)

최명희의 소설을 대하면 어느 벌족한 가문의 종가댁 잔치마당엘 들어선 것 같은 설레는 기대감과 아련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나는 곧 거기서 울을 넘는 음식 냄새와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 이어 뜨락을 메운 질펀한 흥취와 안방 여인네들의 정겨운 어우러짐, 그리고 사랑채 어른들의 경세담들을 모두 한마당에서 만난다. 고색창연한 그 일문의 내력을 숨기고 있는 뒤꼍 대밭의 은밀스런 속삭임까지도…. 최명희는 아마 그 모든 것들을 묵묵히 보고 듣고, 깊이 간직해온 그 집 마당가의 한 그루 늙은 오동나무 혹은 은행 고목인지 모른다. 그래 끝내는 우리 삶의 참모습과 옳은 자리를 보여 주는 「혼불」을 써내게 된 것인지 모른다. ∥이청준(1939∼2008·소설가)

한국인은 삶의 크고 작은 토막들을 통틀어서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더러 '사연'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아예 '말' 그것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 것이 곧 '이야기'이다. 요컨대 '이야기'야말로 우리들이 가장 많이, 가장 긴요하게 주고받는 '말의 말'이다. 그것으로 한국인은 인생을 말하고, 인생을 풀이하고 인생에 매듭을 지어 나갔다. '이야기'로 살고, 사는 것을 이야기 삼아왔다. 최명희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이야기'를 말하는 출중한 '이야기꾼'이다. 근대 말과 현대에 걸친 그 아픈 과도기의 구석구석, 바꾸어 말해서 안방, 집안, 고샅에서 사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현장을 바늘귀로 헤집어서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는 그 아린 사연들을 풀이하는 '이야기꾼'이다. ∥김열규(1932~2013·문학평론가)



최명희는 전라북도 전주시 풍남동(당시 화원동)에서 아버지 최성무와 어머니 허묘순의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관향(貫鄕)은 삭녕이며, 아버지 본향은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560번지(노봉마을)로, 이 마을은 삭녕 최씨의 5백년 세거지다. 그의 부친은 세칭 ‘폄재집안’으로 불린 최수웅의 16대손이며, 일본 유학을 했던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어머니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 출신으로 재야의 사상철학자이자 한학자인 허환(許晥)의 장녀다.

최명희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됐다. 1988년 9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 연재를 시작, 만 7년 2개월 동안 제3부에서 제5부까지 집필했다. 이는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이다.

1990년 12월 「혼불」 제1~2부(전4권)를, 1996년 12월 「혼불」 제1~5부(전10권)을 출간(도서출판 한길사)했다. 이 책은 1999년 교보문고가 전문가 1백 명의 전문가에게 조사한 결과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다. 이외에도 단편소설 「정옥이」(『한국문학』5월호·1980) 「탈공脫空」(『문학사상』11월호·1980) 「만종晩鐘」(전북대 교지 『比斯伐』 8호·1980), 「몌별袂別」(『한국문학』 11월호·1982), 「주소住所」(·1983), 「이웃집 여자」(『일곱 빛깔 무지개 같은』·서울신문사·1983), 장편소설 「제망매가」(전통문화·1985.9~1986.4) 등이 있다.

1994년과 1995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시카고대학교·뉴욕주립대학교·시카고노스팍칼리지·아이오와대학교 등에서 초청 강연했으며, 뉴욕주립대학교의 강연문 「나의 혼, 나의 문학」은 한국학과 고급한국어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한길사 제정 제11회 단재상(1997), 문화부 주관 제16회 세종문화상(1997), 전북애향운동본부 주관 전북애향대상(1997), 동아일보사 주최 제15회 여성동아대상(1998), 호암재단 주관 호암상(예술부문·1998) 등을 수상했으며, 작고 2주기인 200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옥관문화훈장을 추서 했다.

1997년 「혼불」을 출판한 한길사가 중심이 되어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전주에서는 1998년 결성된 <추모위원회>가 제1주기 추모제까지 마치고 2000년 <혼불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됐다. 2004년 남원에서는 독자모임인 <남원 혼불을 사랑하는 모임>이 만들어졌으며, 이후 <혼불정신선양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렇듯 작가와 그의 작품을 기리는 각종 추모 사업과 학술적 조명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남원에는 장편소설 「혼불」을 중심으로 한 혼불문학관이, 전주에는 작가 최명희의 삶과 작품을 중심으로 한 최명희문학관이 각각 2004년과 2006년에 건립됐다.

∥글: 최기우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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