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심을 지닌 땅

언론에 비친

[전북일보 2009-01-23] 설에 다시 읽는 소설 '혼불'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9-01-23 11:28
조회
2493

설에 다시 읽는 소설 '혼불'

맑은 물 한 대접만 올려도 차례 모셔야…

작성 : 2009-01-22 오후 5:32:32 / 수정 : 2009-01-22 오후 7:48:03

전북일보(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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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명희(1947-1998)의 「혼불」은 '한국인의 생활사, 풍속사, 의례와 속신의 백과사전일 뿐 아니라 우리 문화전승의 전범(典範)'이며, 그 기록들을 아름다운 모국어로 생생하게 복원해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설과 작품 속 설 풍경을 통해 우리의 설을 다시 읽는다.

명절, 그것은 어미의 품이었다. 이렇게 세상살이가 고되고 서러워 온몸이 다 떨어진 남루가 될수록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육신을 끌고 와 울음으로 부려 버리고 싶은 것이 바로 명절이었다. 그 울음은 정중 엄숙한 차례나 세배로 나타나기도 하고, 얼음같이 차고 푸른 하늘에 높이 띄워 올리는 연이나, 마당 가운데 가마니를 베개처럼 괴고 뛰는 널, 혹은 방안에 둘러앉아 도·개·걸·윷·모, 소리치며 노는 윷놀이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혼불」 제5권 130쪽)

신원(新元), 혹은 원일(元日)이라고도 하는 정월 초하루는 일 년이 시작되는 새해의 첫날이니, 명절 중의 명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달력을 들여다보며 날짜를 짚어보고, 다시 손가락을 꼬부려 꼽아보면서, 몇 밤을 자고나도 또 몇 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애가 타던' 명절. 식구들의 설빔을 짓는 어머니의 턱 밑에는 작년보다 한 뼘은 더 자란 어린 자식들이 바짝 머리를 들이밀고 앉아 인두판 위에 놓인 꽃분홍과 연노랑의 옷감에 흘려, 어머니가 바느질하는 손길을 또랑또랑하게 바라보았다. 달빛이 이슬에 씻긴 듯 차고 맑게 넘치면서 점점 둥글어지면 어린 최명희의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 집안 가득한 참기름 냄새의 고소함도 그렇거니와, 모처럼 큰집에 가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지나치게 어려워 몇 마디 말씀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던 작가의 아버지도, 이날만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기차를 탔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성품이며, 선대 어른들이 남긴 말씀과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지금 큰집에 가면 만나 뵈올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들려주었다.

"간치내(鵲川) 작은 아부지 오시네요."

사촌 언니의 반가운 목소리가 고삿으로 울려온다. 큰아버지는 날렵한 칼로 밤을 치고, 뒤꼍에서는 과일들을 정갈하게 챙기며, 선영에 바칠 음식을 빚느라고 눈부시게 하얀 쌀을 씻었다. 아, 썰어도, 썰어도 끝이 없던 가래떡과 전을 부치는 흥겨운 기름소리. 작가가 기억하는 그믐의 달빛은 흥에 겨운 들뜸이 지붕 위며, 마을이며, 들판과 산야에 풍요롭고 휘황하게 넘쳤다.

그러나 최명희가 그려낸 「혼불」 속 시절은 '집집마다 떡쌀은커녕 싸라기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암흑의 시기다. 몰래 묻어 놓은 제기마저 놋그릇이라고 공출당한 끝에, 그 누가 설날 차례인들 변변히 올릴 수 있었을까. 작가는 청암부인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그저 오직 맑은 청수(淸水) 한 대접 올리고 돌아앉아 우는 한이 있어도, 정월 초하룻날 원단(元旦)에는 나름대로 차례를 모셔야한다"라고.

제물(祭物)을 넉넉하고 풍부하게 갖추어 성대히 차리는 것만이 성효가 아니니, 오직 변함없는 마음으로 성의와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자기 처지대로, 메 한 그릇과 갱 한 그릇이라도 온 정성을 다 바쳐서 정결하게 올리면 신명이 기꺼이 흠향하실 것이다. (「혼불」 4권 278쪽)

천지가 아직 맑은 기운의 비밀을 머금고 있는 시각, 차례를 올리고 나선 성묘길. 명석한 겨울 햇볕을 이마에 받으며 꽁지에 따라가는 아이들은 그때마다 웬일인지 어제보다 손톱만큼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으리라.

/최기우(최명희문학관 기획실장·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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