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필휘지(一筆揮之)란 걸 믿지 않는다. 원고지 한 칸마다 나 자신을 조금씩 덜어 넣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고 최명희(1947∼98·사진)씨는 생전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씨 고향인 전북 전주에 있는 최명희문학관은 원고지 1만2000장 분량의 ‘혼불’을 일반인들이 한 장씩 옮겨 적는 이벤트를 펴고 있다. 최씨가 17년에 걸쳐 써내려간 5부 10권의 원고를 각자의 필체로 베껴 쓰는 작업이다.
“작가 최명희의 치열하고 섬세한 정신, 그리고 절절한 예술혼을 온몸에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소설의 첫 문장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를 옮겨 적은 장성수(전북대 교수) 문학관장은 “작업에 동참하면 작가가 집필에 쏟아 부은 필사(必死)의 흔적과 더불어 행간 속에 담겨진 시대와 인간들의 고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작업은 11월 말까지 ‘필사의 힘, 필사의 노력’이라는 주제로 펼쳐진다. 매안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기준으로 하지만 한길사에서 펴낸 책으로 해도 무관하다.
1부(흔들리는 바람·1∼2권) 필사는 문학관에서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2부(평토제·3∼4권)부터는 전화나 이메일로 신청을 한 뒤 각자 분량을 맡아 참여할 수 있다. 문학관 측은 최씨가 쓴 것과 비슷한 형태로 원고지를 인쇄해 대상자에게 보내주고 있다.
“반응이 예상보다 뜨겁습니다. 전국에서 10권 전권을 모두 써보겠다는 사람이나 동아리도 10여 곳이나 됩니다.”
장 관장은 “원고지 높이만 3m가 넘는 이번 일은 ‘혼불’을 다시 활물화(活物化)하는 귀한 작업”이라며 “하나의 언어, 하나의 사물이 진정한 존재로 다시 살아나는 시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사본은 문학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에도 기증될 예정이다(063-284-0570).
‘혼불’은 최씨가 1980년 4월 시작해 1996년 12월 완간한 소설로 1930년대 남원을 배경으로 몰락해가는 양반가의 며느리 3대 이야기를 통해 힘겨운 삶의 모습과 정신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