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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전북도민일보 20231117][최명희문학관_수필가 김순영의 삶과 문학] ⑥문단의 기수 김순영 수필가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3-11-27 20:47
조회
47
 

수필집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서』를 읽고

한 사람이 걸어온 길. 그 길에서 그가 만져 본 것들, 쪼그려 앉아 눈을 맞춘 것들, 듣고 끄덕였던 이야기들이 담긴 상자를 주웠다. 주위를 살핀다. 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슬쩍 긴 벤치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상자를 놓는다.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인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음이다.

김순영(1937∼2019)의 수필집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서’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열어 집게손가락을 넣어 본다. 상자 안에 빽빽하게 들어찬 글들이 손가락을 간질인다. 혼자서 키득거리다가 엄지와 검지로 무작정 글 하나를 상자 밖으로 꺼낸다. 그렇게 꺼낸 글이 홀로그램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김순영(1937∼2019)의 수필집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서』는 그렇게 내게로 왔다.

이 수필집에는 60편의 수필이 있다. 여행, 일상, 문학, 비평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담았다.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쫀쫀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써낸 글이다. 때론 봄날 아지랑이처럼 몽롱하게, 여름 햇살처럼 뜨겁게, 가을 낙엽처럼 처연하게, 겨울의 눈처럼 가볍고 따뜻하게 풀어낸 글에서 감성이 무엇인지 진짜 이야기가 무엇인지 귀띔해 준다.

그의 초년은 참으로 험난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의 시간 속에서 그는 의사이면서 사회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녔다. 20세에는 이태영 변호사 같은 법조인이 되고자 이화여대 법학과를 들어가지만, 교통사고는 그의 꿈을 무참히 뭉갰다. 몸과 마음에 스키드마크를 남기고 전주에 돌아온 그는 전주저금관리국 체신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25살, 신문사 두 곳에서 신춘문예가 당선되면서 작가가 된다. 그러나 수필과의 해후는 마흔이 넘어서였다.

마흔이 넘어 쓴 수필은 눅진한 삶의 경험과 지혜 속에서 팔딱인다. 그의 글은 생명력을 담보로 하고 있다. 무엇하나 지나치지 않으려는 매와 같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이해하고 기록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작품 곳곳에 선명하다. 젊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나이 들어 보다 보니 그 깊이가 더하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오래 끓인 곰탕처럼 진한 속내가 느껴진다.

그를 문학으로 이끈 이는 참으로 많다. 우선 최승범 시인이다. 전주여고 재학 시절 교생으로 온 최승범 시인에게 ‘에세이’란 단어를 들었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꿈꾸게 한 단어였다. 선생님은 필사를 강조했는데 성실한 김순영은 곧바로 실천했다. 필사는 훗날 김순영식 수필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다른 이는 선배 정영희 작가다. 이화여대 창립호에 실린 그의 소설 「회색의 계단」을 읽고 김순영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대학 3학년이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은 정도로 뛰어난 소설이었다. 이외에도 이영도 시조 시인, 백양촌 시인, 신석정 시인을 가까이서 흠모하며 그들의 문학적 성취의 비법이 무엇인지 관찰하고 귀담아듣고 배우려 애를 썼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건 어떤 사람의 삶에 간단없이 침윤되어 그것으로부터 정서가 자극을 받아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된다면 축복이 아닐까? ∥수필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서」 중에서

그는 ‘수필은 있는 그대로 맛을 살리는 글쓰기’라고 말했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것처럼 문학도 기교 대신 적확한 단어를 사용해 정직한 문장을 맛깔스럽게 써야 한다고 권했다.

쓰고 또 쓰고 작업을 부단히 계속하여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수필, 문학성이 뛰어난 수필, 독자들로부터 감동과 감화를 유발시키는 생명력 있는 수필을 쓰는 수필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수필 「생명력 있는 수필가」 중에서

그는 자신이 살았던 고장에 대한 애정이 유독 남달랐다.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정읍은 물론이고 인생의 대부분을 살았던 전주는 더했다. 타지에 나갔다가 전주 초입만 보여도 괜히 흥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던 그는 전주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러니 타지에서 손님이 오면 전주 홍보대사를 자처한 건 당연했으리라.

나와 남편과 아들과 딸이 태어나 성장하고 교육받고 직장 생활하고 정년퇴직하고 지금껏 살고 있는 고장 그리고 부모님의 유택이 있는 곳, 어느 한 곳인들 외면할 수 있으랴. 어느 곳인들 사랑하지 않으랴. ∥수필 「전라북도는 전라복도」 중에서

수필은 터전의 이야기이다. 자기 삶의 터전을 알려 들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수필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김순영은 진짜 수필을 쓰는 진짜 수필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계절을 사랑하고 매일 반복되는 그저 그런 아침도 새롭게 보는 눈을 가졌다. 그에게 계절은 오고 가는 자연현상이 아닌 뜻밖의 기쁨과 희열과 만남을 기대하게 하는 대상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봄에는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사서 품에 안고 거리를 걷고, 겨울에는 변화무쌍한 날씨에 환호성을 지르는 어린아이가 되어 본다. 가을이면 짙어지는 단풍만큼이나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여름이 되면 푸르른 잎사귀마다 눈길을 주어 생명의 신비함과 찬란함을 마음에 새겼다. 매양 놀랄 준비가 되어있기에 그의 글은 매번 놀라움 그 자체다.
 
철학적 사색은 사물을 보고 놀랐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고 한다. 놀라움을 상실하여 놀라워할 줄을 모른다면 철학적 사색의 불씨가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한다. ∥수필 「놀라움아, 어디 있니」 중에서

김순영은 대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물론이고 성실함을 무기로 아무렇게나 쓰는 글이 아닌 작은 것 하나라도 꼼꼼히 관찰하고 조사해서 진실한 글을 썼다. 그의 작가 정신은 이렇듯 군더더기 없는 정직함이다.

내 이름 김순영의 받침을 떼어 버리면 기수여가 된다. 그토록 부러워했던 기수라는 단어가 내 이름 속에 숨겨져 있지 않은가. ∥수필 「기수여」 중에서

김순영은 약속과 예의를 지키고 책임과 의무를 실천하는 작가로 살다가 2019년 82세의 나이로 소천, 전북 문단의 영원한 기수로 남았다.

 글_ 김근혜 동화작가, 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
※김근혜 작가는 동화 『다짜고짜 맹탐정』, 『봉주르요리교실 실종사건』, 『유령이 된 소년』, 『나는 나야!』, 『제롬랜드의 비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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