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1-03-09] 전주가 벗 삼아 들려주는 아리잠직한 이야기

작가 최명희는 유독 <혼불>과 같은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유려한 우리말의 가치를 재발견한바 있다. 모습이 얌전하며 귀여운 모양새의 뜻을 가진 이 말은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두 칸 남짓의 아담한 문학관에 제법 그럴듯한 수식어였다. 창작의 인고의 세월의 높이를 보여주는 듯한 원고지의 규모하며 친필 사인 책, 그리고 그녀의 단편소설과 대표적 <혼불> 등의 작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아리잠직한 삶과 작품을 남기고 떠난 그녀에게어울릴만한 품격의 문학관이었던 셈이다.

전주에는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사람들과 공간과 멋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이차를 생각하지 않고 누
구에게나 편하게 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살아온 시간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살아오고자 했던 나였
다. 그래도 전주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건물과 공간이 버틴 시간의 힘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옥마
을 안팎으로 70년 이상을 버틴 가정집, 100여년을 버틴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 그리고 그 시간
의 힘을 실록이라는 형태로 남겨둔 전주 사고가 있었다. 한편 자신의 작품에 이렇게 티 없이 맑은 고장
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평생 노래함을 주저하지 않았고 기꺼이 창작의 인고의 시간을 감내한 아리잠직
한 한 작가도 존재하였다. 많지 않은 시간 동안 전주를 참 잘 알고 있는 벗과 함께 할 수 있어 더더욱 기
뻤다. 서로 성장하며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는 시간의 깊이는 아마도 이곳의 오랜 고풍스런 가정집만
도 못할 것이다. 한옥마을의 가옥처럼 70여년이 흘러 때로는 개보수가 필요하여 낡고 아프고 힘들어
도, 연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1박 2일간 일행을 이뤄 함께 해준 나의 벗, 오봉현
과 함께 한 인연의 깊이가 전주처럼 온전하고 흠이 없고 그래서 순수하고 티 없이 맑기를 소망한다.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산책과도 같은 시간동안 이 도시의 고유한 독특함을 모두 다 느꼈다면그건 거짓
말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것들을 참 많이도 갖고 있는 이 도시를 내심 ‘오리지널리티의 공
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주는 나에게 새로운 기분 좋은 지상명령을 내렸다. 오래 버텨온 것들의 고유
함을 인정하고 예우하는 품격 말이다. 이것은 비단 전주와 같은 공간에만 해당되는 말인 아닐 터. 명
절 때마다 둥근 보름달빛을 만끽하면서 풍요로움을 느끼듯, 이번 전주 기행은 그러한 달빛을 몸과 마
음속으로 적신 짧은 기행이었다. 소중한 벗의 모친이 한지로 아리잠직하게 만들어 선물로 주신 하얀
고무신과 까만 고무신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