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심을 지닌 땅

언론에 비친

[국회보 2012-07-10]전주 한옥에서 예향의 정취에 젖다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2-07-18 13:55
조회
2895

매체: 국회보
날짜: 2012년 7월호
제목: 전주 한옥에서 예향의 정취에 젖다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23&oid=358&aid=0000000869
글지: 이재철



초 여름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는 5월의 네 번째 토요일 오후 전주 한옥마을을 방문하기 위해 먼저 전주도읍의 남쪽관문인 풍남문(豊南門) 앞에 섰다. 보물 제 308호인 풍남문은 도성의 남쪽 관문으로 일제가 들어오기 전에는 북문(공북문), 서문(패서문), 동문(완동문)과 함께 존재하였으나, 1907년 조선총독부의 폐성령에 의해 나머지 3개의 대문은 철폐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2층으로 지어진 아담하고 고졸한 한식건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성문 앞에는 저자거리가 형성되기 마련이라 지금도 전주시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인 남부시장이 자리 잡고 있어 생필품의 교환 장소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팔달로를 건너면 오목대까지 태조로(太朝路)가 이어진다. 중세 유럽의 도로처럼 돌을 직사각형으로 깎아 길에 박아 만든 길로서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고, 흰 머리도 검게 만든다는 회화나무(일명 회초리나무)로 조성된 가로수의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 길은 이 태조가 황산벌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대승한 후 지났을 것으로 여겨져 그 이름마저 태조로로 명명되었다.
태조로에서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담하고 고풍스런 로마네스크식 전동성당이 보인다. 전동성당은 1791년 신유박해 때에 윤지충과 권상연 및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처형당한 장소에 1907년부터 1914년에 걸쳐 건립되었다. 풍남문 성벽이 헐릴 때 나온 석자재를 사용하여 건축된 것으로 호남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백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벽돌로 만든 아치식의 입구를 들어서면 스테인글라스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빛이 성당 돔 양식 내부에 깊숙이 파고들어 포근하게 느껴졌다. 4명의 순교를 안타깝게 여겨 지어진 천주교의 성지로, 이들의 유해는 승암산에 안치되어 있다.

역사의 깊이를 더하는 태조 어전과 전주사고
성당을 지나 태조로를 따라 올라가면 좌측으로 경사스러운 기운이 모이는 전각이라는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그 입구에는 지차개하마(支此皆下馬) 잡인무득입(雜人毋得入)이라고 암수 사자 등위의 비석에 새겨진 하마비가 있다. 이곳은 어진이 계시는 정전임으로 계급이 높든지 낮든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누구든지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으로 경기전을 얼마나 신성시 했는지 알만하다.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에 전주에 세워졌으나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6년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옛 전주 부성내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경기전 서쪽을 분할하여 일본인 전용인 수상소학교를 세워, 절반 이상의 땅을 상실하였고 부속건물 역시 거의 철거되었으나, 수많은 전각 중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하급관리가 수직하는 수복청(守僕廳)만이 최근 복원되었다. 홍살문을 지나 내·외삼문의 세문을 지나면 정(丁)자 모양의 어진전이 보인다. 조선태조 어용(御容)은 생전에 그려져 경주 집경전에 모셔진 바 있으나, 이 어진을 1410년에 본떠 다시 그린 것으로 세종 24년에 이곳에 봉안되었다. 이 어진은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으로 피난을 가는 등 여러 번의 수난을 겪다가 세월의 풍상을 견디지 못하여 낡고 헐어서 세초한 후 백자항아리에 넣어 본전 뒤 북쪽 계단에 묻혔다고 전한다. 현재의 어진은 이를 1872년에 조중목이 모사한 것으로 최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으며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등 6분의 영정과 함께 정전 뒤쪽에 최근 지어진 어진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
어진전을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동문 옆 대나무 숲 인근에 봄을 제일 먼저 알린다는 청매화 나무가 휘어져 땅에 닿은 채로 자태를 뽐내면서 소중한 열매를 맺고 있다. 누가 이 나무를 심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100년 이상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까? 심은 사람에게, 매화나무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뿐이며 다시 수 백년을 더 살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몇 발자국 떼면 전주사고 건물이 있다. 역사를 중시하는 세종대왕은 1445년에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네 곳에 실록을 각각 1부씩을 봉안하였다. 임난 직전 전주사고에는 태조 때부터 명조 대까지의 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각종 문헌 1천344책이 보관되었다. 왜군이 밀려오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전라감사 이광, 전주부윤 권수, 태인 지방의 선비 안의 및 손흥록 등과 함께 이성계의 어진과 왕조실록을 내장산 깊숙한 은적암과 비래암에 피신시켜 유일하게 임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어, 오늘날 우리의 역사를 잃지 않은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각종 사극이나 고증의 밑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나라를 잃어버려도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자랑스러운 조상이 아닐 수 없으며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전 동문으로 돌담을 나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몇 걸음 떼면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관이 있다. 첫 장 ‘청사초롱’을 읽자면 10권 마지막까지 읽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장편 소설이다. 어디에서 그토록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우리 문화의 원류를 제시하였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육필원고가 수북이 쌓여 있고, 당신이 쓰던 만년필 등 소지품을 보고 있으면 작가의 고뇌가 가슴에 전달되는 것만 같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혼을 지키겠다는 당신의 집념이 산화되어 일찍 돌아가시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당신이 없는 전주가 갑자기 허전해짐은 웬 까닭인가?

작가 최명희 생가를 지나쳐 은행나무 길에 이르면 길 한쪽에는 S자 모양의 굴곡진 실개천이 흘러 더위를 식혀준다. 실개천을 따라 걸어가면 곳곳에 정각과 돌 의자가 있어 쉬어 갈 수 있고, 앙증맞은 두꺼비 형상의 조형물 등이 눈길을 끌고 작은 분수며, 물레방아, 각종의 나무와 전통 한방찻집, 민박집 등 한옥이 즐비하다. 여기가 바로 한옥마을의 중심부다.

전주 한옥마을은 TV촬영 명소로 인기
길가에 솜씨를 뽐내며 만들어 팔고 있는 각종 공예품에 눈길을 뺏기다 보면 어느덧 허기가 진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어느 상점에라도 들어서면 돌확이나 다듬이, 한지 갓등 등 전통 장식품이 곳곳에 즐비하고, 특히 집집마다 화분에 예쁜 야생화를 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전주 사람들의 정서가 느껴졌다. 500년 이상된 최씨네 종각 은행나무는 그 자식을 보아 애지중지 기르고 있으며, 기와와 돌담 등으로 장식된 미로처럼 꼬불거리는 나즈막한 골목에서는 숨박꼭질 하는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만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이곳이 특이한 점은 모든 한옥이 주인이 직접 생활을 하거나, 민박을 하거나, 한지 생산 등 공예품을 만들거나 하여,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통한옥의 맛과 풍류를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다른 지역과 다른 것이다.
은행로와 태조로의 교차점 사거리를 지나 왼쪽 교동으로 길을 잡아 나아가면 노거수 은행나무가 우람한 전주 향교가 있다. 대성전 및 명륜당 등 건물이 서울 성균관 다음으로 그 형태가 온전하여 가을이면 촬영장소로 유명하여 ‘성균관스캔들’과 ‘1박 2일’ 등을 여기에서 촬영하였다.
길을 되돌아 나와 오목대로 오르다가 보면 한옥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505년 된 느티나무인 당산나무가 허리띠를 두른 채 우리를 반긴다.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면 전북 도지사와 전주 시장 등이 나와 당산제를 지낸다니 참으로 복 받은 나무라 여겨져 부러울 뿐이다. 오목대 정상에 이르면 커다란 정각이 있고 그 옆에는 백여년 된 백일홍으로 둘러 친 작은 정각 안에 고종 친필 비석이 있다. 고려 말 황산에 창궐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개선중인 이성계 장군이, 자기네 집안이 함경도 함흥으로 이사 가기 전부터 오목대 인근에서 살아왔던 종친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면서 대풍가를 읊었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를 보인 것이다. 이를 본 포은 정몽주는 전주천 건너 앞에 있는 남고산에 올라 걱정하는 시를 지어 돌에 새겼다.
눈을 들어 동쪽을 바라보면 중바위(일명 승암산 혹은 치명자산)가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절벽이 자연성(城)이 되어 후백제의 견훤왕이 성채를 지었다는 곳이다. 그곳에 가보면 모두 69칸의 육중한 주춧돌이 가지런히 정열되어 있고, 인근에 건물지가 다수 있으며, 아들에게 유폐되어 한이 서려 구부러진 소나무 수십 그루가 지금까지 자라고 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오목대를 뒤로 하고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오다가 전망대에 오르면 한옥마을이 가장 잘 보인다. 유연하게 치켜든 용마루선과 팔작지붕,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이웃지붕 등 한옥의 멋스러움을 가장 느낄 수 있다. 또한 전동 성당의 성탑과 천도교의 교구당, 기독교의 개신교회, 무당을 상징하는 간짓대의 깃발, 전봉준을 기념하는 동학기념관, 성리학으로서의 유교 등의 여러 종파가 인근지역에 부대끼면서 이웃하고 살고 있으나 서로 다투지 아니하면서, 너는 틀리고 내가 옳다면서 자기 것을 강요하지 않고, 내 것과 다름을 인정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음을 볼 때, 진정한 종교의 자유와 평화가 이 곳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주부성의 서쪽에서부터 성곽을 허물고 일본식 가옥을 지으면서 점점 동진을 하는 것을 본 전주 양반들이, 이에 반기를 들고 조선의 정기를 보전하기 위해 성(城)의 동쪽에 한옥을 한 채 두 채 짓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지금은 700여 채에 이른단다.
시장기가 목구멍에 차올라 한정식을 먹을까, 비빔밥, 아니면 콩나물국밥을 먹을까, 망설이다가 콩나물국밥은 내일 아침 해장으로 하기로 작정하고 저녁에 한정식을 시켜보니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가지 수가 많기도 하지만 밑반찬의 맛이 예전의 그 맛을 조금도 잃지 아니하여 반갑기 그지 없었다. 퓨전음식이 아닌 순수 우리 고유의 음식 맛이다. 무주, 진안, 장수 등 산악지방의 임산물과 김제평야의 농산물 및 서해의 해산물 등 각종 식재료가 풍부하여 이런 수준높은 음식문화가 탄생된 것이라 이해되었다.
배도 부르고 눈요기를 더하기 위해 골목을 돌아다니니 전통 한지를 생산하는 조그마한 가내공장이 눈에 들어 왔다. 자연의 색으로 물감을 들인 한지가 넥타이며 양말이며 잠옷이며 수의 등의 각종 소재로 활용된다는 말을 듣고 보니, 옛것이라도 잘만 활용하여 현대에 적용하면 멋스러움을 더할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 또한 상당하리라 여겨졌다. 전주 소리의 전당이라는 3채의 작은 한옥건물에 들어서니 해마달(해 같은 마패를 달같이 들어 메고)이라는 마당극과 창극을 합친 새로운 장르가 공연되었다. 춘향가 중 ‘변학도 생일 잔치 및 암행어사 출도’ 장면을 안숙선, 김영자, 조영자, 이난초, 왕기석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열연하였다. 10월 27일까지는 매주 토요일 저녁 8시에 공연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옥 건물에선 마당극과 창극 합친 공연도
특히 한옥을 배경삼아 펼쳐지는 조명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은은한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였다. 춘향역을 맡은 배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그마한 몸집 어디에서 그렇게 크고 애절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옥중 춘향이의 애절한 통곡이 듣는 이의 가슴에 저미어 왔다. 신분을 뛰어 넘은 고귀한 사랑과 해학 및 풍자, 시대에 대한 고발과 쾌도난마식의 해결로 정의감을 실현하는 구성이야말로 이 시대에도 인기가 있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제는 몸도 곤하여 인근의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하기로 하였다. 내일은 승암산에 올라 견훤왕의 성채터를 볼까? 아니면 남고사의 절에 가서 정몽주의 시를 읽어볼까? 생각에 잠기다가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의 열기가 온 몸에 퍼지면서 스스르 잠이 들었다. 진정 느긋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다. 혼자 경험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과분하고 미안하여 여러분에게도 동참의 추천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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