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살소살

삶을닮다(오늘의필록)

그 눈은 아리다.

작성자
Oz
작성일
2007-07-06 15:46
조회
2960

어둠을 제치고 어렴풋이 들려오는 전화 벨소리에 잠이 깨고 만다.

부족한 수면으로 무거운 몸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서파수면(徐波睡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초저녁부터 잠을 청했는데 휴대전화 꺼놓는 걸 깜박했다. Frank Sinatra의 My Way가 울리는 것을 보면 친구들 중 한 명이다.

좋아하는 노래가 갑자기 싫어진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이 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시할까 했지만 후일 10년 우정 필요 없다는 친구의 얄궂은 농담이 듣기 싫어 몸을 일으킨다. 한참 전화를 찾아 헤매다 베개 밑에서 전화를 찾는다. 숙면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지만 평소 습관처럼 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전화를 놓았던 것이다.

B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자 늦게 받는다면 타박이다. 자고 있었고 다시 잘 생각이니 용건만 간단히 라고 부탁하지만 통화는 10분을 훌쩍 넘겨버린다. 결국 만나서 술 한 잔하잖다.

「힘들면 말해 비싼 술집은 못가도 포창마차에서 소주 한 잔 못 사겠어.」

평소 친구들에게 한 말이 있어 거절하지 못하고 집을 나선다. 괜히 나에게 미안해져 평소 잘 타지 않던 택시를 탄다.

친구라는 말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친구를 배신했다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주홍글씨마냥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상한 빚이 생긴다. 나 역시 친구를 배신한 아무개와 절연(絶緣)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다. 말 한마디로 친구라는 인연을 끊으려 했으니 이 얼마나 오만하고 아둔한 짓인가.

각설하고 이 B는 특이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을 6개월 이상 만나지 못하고 이별하게 된다. 이별이라는 표현보다는 그냥 보내준다는 표현을 써야 옳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람둥이 기질로 연인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인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으니 자신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라며 헤어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사랑해서 헤어지는 거야.」라는 진부한 변명이 B에게는 통한다.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내 연인이 보다 자상한 사람,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 인물이 뛰어나고 지식이 많은 사람 곁에서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통 이런 생각이 질투나 집착으로 이어지는 반면 B는 이별로 이어진다.

「자신감이 없다.」「진정한 사랑을 못해봤다. 「자기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남자다.」

질책 속에서도 B는 자신의 연애관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나 역시 인연(因緣)은 인연(引延)이라고 잡아당겨 늘려보라 충고하지만 B는 피식하고 웃을 뿐이다.

술자리에서 만난 B와 나눈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헤어졌던 연인 C를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본 것이다. B는 한참을 숨어서 지켜봤고 C는 다른 사람을 만나 사라졌다고 한다. B는 C의 모습에서 자신과 있을 때보다 더 큰 행복함을 보았고 자신 또한 행복했다고 한다.

「행복하다며 술은 왜 마셔?」

「행복하니깐.」

불교에서는 인연을 원인이 되는 인(因)과 그 결과인 연(緣)에 의하여 발생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즉 이것과 저것은 인연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B로 인해 C가 행복하고 C로 인해 B가 행복했다는 것은 인연의 상호작용에 의해서인가? B가 C를 만나고 이별한 것은 C가 다른 사람 곁에서 행복하고 B가 그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기 위해서인가? 내 어리석은 분별심으로는 판단하기 힘들다. 다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있고 나로 인해 다른 이가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삶을 쉽게 살 수 없을 것 같다. 가까이 두 손을 잡고 있어도, 천리 먼 길 떨어져 서로를 잊고 살아도 인연은 신비로운 주술마냥 붉은 끈으로 이어 멈추지 않고 서로를 얽혀가는 것이다.

B가 마지막 술잔을 비우면 말했다.

「이제 나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연인이 된 C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새로운 인연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의 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연인의 행복함을 보면서 다행이라 말하는 저 눈이 참말로 내 맘을 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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