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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20221128]수필가 목경희의 삶과 문학⑤길 바보를 따라 걷는 길: 『길 바보의 고백』을 읽고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2-11-28 15:45
조회
594
  • 매체: 전북도민일보
  • 날짜: 2022년 11월 28일
  • 제목: [최명희문학관_수필가 목경희의 삶과 문학] ⑤ 길 바보를 따라 걷는 길: 『길 바보의 고백』을 읽고
  • 출처: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4708
  • 쓴이: 최아현 소설가
나는 늘 정직하고 구체적인 문장을 쓰고자 했다. 순간의 감각을 분명하게 묘사하는 힘을 갖고 싶었다. 『길 바보의 고백』(교음사·1997)을 읽으며 원하는 힘을 기를 방법에 대한 실마리 얻었다. 동시에 그를 진심으로 흠모하게 되었다.

감정에 치우친다며 자신의 글에 엄격하던 그의 말과 달리 수필 속 문장은 꼼꼼하고 세밀한 관찰가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정갈한 문장을 종이에 남겼다.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돌보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그의 수필은 나에게 무엇을 먼저 시작하면 좋을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셈이다.

목경희는 1927년생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관통한 사람이다. 수필 곳곳에 역사를 지나온 한 개인의 삶이 자주 등장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전북고녀(현 전주여자고등학교)를 다녔던 그가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옛 터를 찾아서」와 신혼 초 피난길을 묘사한 「동생」에서는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 한 가운데에서 고단한 세월을 살아낸 여성의 이야기가 연달아 등장한다. 역사책에서는 수치나 의의 따위로 뭉뚱그려진 이야기가 그의 문장으로 낱낱이 살아난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16회는 한 시대가 낳은 불운아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어렸을 때 지나사변이 일어났고 여고 1학년 2학기에 소위 저들이 말하는 대동아전쟁(편집자 주: 태평양전쟁)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우리 때부터 교복은 평준화되어서 동경하던 세라복도 입어보지 못했다. 수학여행은 생각조차도 못했다. 몸빼에 방공복, 방공모를 뒤집어쓰고 방공호를 안방처럼 들락거리며 밝은 불빛 아래서 마음 놓고 공부해 보지도 못했다. 거기에 바로 우리 16회가 저 전율의 정신대의 표적이었다.

우리의 꿈은 펴보지도 못하고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 나는 겨울방학 동안에 약혼식이라는 절차를 밟았다. 결혼식까지 치른 학우들도 있었다. 일제는 이렇게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옛 터를 찾아서」 중에서

인민군이 전주까지 밀고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먼 길을 달려오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대충 중요한 가재도구를 소달구지에 싣고 아버지 따라 피난을 갔었다. 세 살배기 혜신이는 남편이 업고 갓 돌 지난 치문이는 내가 업고 내려쬐이는 불볕더위 속을 백 리 길을 걸었다. ∥「동생」 중에서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는 해방이 됐고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의 수필은 지난 역사의 생생한 대목이기도 하다. 근현대사의 많은 기록이 귀하고 중요하지만, 그의 수필에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풍경들이 잘 드러나 있다. 등장하는 이름과 장면들이 당대 여성들의 삶 구석구석을 전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 마음을 흔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전주여고 70주년 기념행사에 들른 소회를 적은 「나누는 기쁨(2)」에 등장한 ‘일제의 잔학성과 여성 학대 정책과 정신대 문제를 맨몸으로 막으시다가 징계를 받으며’ 교직 생활을 했다는 지동옥(池東玉) 선생의 이야기다. 그의 수필을 읽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전주 지역 현대 여성사의 귀중한 기록이다.

전북에서 유일하게 여성 교장을 지낸 지동옥 선생부터 자모회 활동을 하며 공동체 한쪽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 어느 이름 모를 계란 장수의 삶까지. 전라북도에서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던 그의 생과 함께 여럿의 삶이 수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바람에 남지 못한 이야기가 참 많다. 그 가운데 여성의 기록이면서 전주의 것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늘 있었다. 기록은 항상 중앙중심적이고 정치적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달에 두어 번은 방문하던 도서관의 어느 책장이 듣고 싶어 목말랐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원하던 책을 발치에 두고 나는 자꾸만 먼 곳에서 가까운 곳의 기록을 찾으려 한 것이 못내 후회됐다.

또 청년 시기와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향하는 그의 곁에서 여성에게는 살갑지 않았던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선연한 감정이 여러 번 마음을 건드렸다. 특히 「내 마음 쉴 곳을 잃고」, 「자전거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의 고고하고 단단한 심지가 큰 위로가 되었다. 그가 경험한 시대와 현대를 사는 내가 여전히 공유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풍류를 즐기는 여성에게 ‘돌출적인 행위’라고 표현한다던가, 통념대로 행동하지 않은 여성에게 ‘세상이 많이 변했어’ 같은 말들로 면박을 주는 일은 오늘날에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즐거움을 명료하게 알고 일상을 살뜰히 꾸려나간다. 그런 그의 모습이 지금의 내가 갖고 싶었던 건강한 어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것은 자연 찬미와 방랑의 벽인 것 같다. 그것은 정신적인 여유로도 통할 수 있겠으나 여성이라는 사회적 제약과 주부라는 엄숙한 위치에서 볼 때 조금은 돌출적인 행위라고 지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한 낭만과 삶의 여유가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내 마음 쉴 곳을 잃고」 중에서

그때는 여학생이 지금의 대학생보다 더 귀한 때였다. 거기에다 자전거까지 탔으니 그것은 놀라운 구경거리였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어.” 하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자전거 이야기」 중에서

세상은 많이 변해왔고,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어떤 것들은 지난하게 변화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여전히 여자 혼자 온 손님은 받지 않는 식당이 있고, 첫 손님으로 안경 쓴 여자를 태우면 재수가 없다고 말하는 택시를 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오래 묵은 불합리와 말도 안 되는 관용구 따위는 개인의 삶 곳곳에 치사하게 숨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야말로 졸렬해 보이고 치사해 보일지라도 말로 자꾸 꺼내 떠들어야 한다. 살기 좋아진 세상에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꼿꼿한 그의 글에서 오래전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누군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보느라 탄식하는 쪽보다는 나의 중심을 가지고 자기 삶을 가꾸는 어른 말이다.

책을 통해 만난 그의 모습 중에서 길 바보인 덕에 온 거리를 걸어 기쁘다는 그의 태도를 가장 닮고 싶다. 그가 어려움에도 쉬지 않고 걸어 곳곳에 발길을, 땀방울을 새기던 마음을 갖고 싶다. 그는 자주 감사하고 기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배움에는 안주하지 않았다. 주변을 살뜰히 돌보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했던 것 같다.

책머리에 ‘삶이 워낙 서툴러서 엮어놓고 보면 석새 삼베와 같이 엉성하여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하면서도 ‘글은 곧 저의 호흡이며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글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질문하며 찬찬히 글을 쓴 덕에 그가 어디든 걸어볼 수 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걸음마다 불안하지만 ‘온종일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다’는 그의 말이 큰 위로가 된다. 앞서 걸어간 이의 발자국을 길잡이 삼아 걷는 것처럼.

∥글 최아현(소설가)
―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으며, 전북교육연수원 연수 강사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장웹진 청년간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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