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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20221124]수필가 목경희의 삶과 문학④그녀들의 사모곡: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를 읽고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2-11-24 10:49
조회
415
삶의 끝자락에 서 있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마지막이 축복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을 만났다. 목경희·박혜신의 『분홍옷 갈아 입고 꽃길을 가네』(교음사·1991)이다.

1991년에 나온 이 책은 목경희(1927~2015)·박혜신(1946~1987) 어머니와 딸의 산문집이다. 출간 당시 전주 문인의 저작이 인기도서에 오라 큰 주목을 받았다. 목경희의 수필 26편과 딸에게 보낸 편지글 11편에 3개월의 간병일기가 실렸고, 박혜신의 칼럼 13편과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30편,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 26편이 수록되어 있다.

인생의 고통에 창조적으로 반응하여 온전한 성숙을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망과 분노로 좌절하며 낙오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목경희 작가의 고난 극복은 탁월하다. 그녀가 35세 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둘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녀는 자신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지 못하도록 수예를 배우며 창조적으로 고통을 극복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회갑을 갓 넘은 나이에 의지하고 아끼던 고명딸을 또 먼저 보내게 된다. 젊은 딸을 보낸 후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았기에 몸부림을 치며 암울한 동굴에 불을 켰다. 4년 뒤에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딸을 보내주는 고귀한 여정이다.

전반부에 실린 목경희의 수필 26편에는 대상에 대한 깊은 사유와 삶의 성찰이 있다. 유난히 꽃을 좋아했던 작가는 성근 눈발이 날리는 날 찾아온 매화의 고즈넉한 향을 홀로 차지하지 않는다. 친구를 불러서 인고의 고개를 넘어온 매화를 환대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 애가 타는 작가의 고운 심성이 꽃보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순간들이다.

가을은 코스모스의 하늘거림을 따라 영글어간다. 하양, 분홍, 자주 여러 색깔을 입은 코스모스 잎들이 파란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모습은 추억을 불러오기에 적합하다.

코스모스에는 해방의 감격이 있고 나의 젊은 날의 추억이 있고 그리운 고향산천이 있기에 코스모스 앞에 서면 언제나 새롭게 가슴이 설레는 것이리라. 지나온 발자국들이 험한 세파에 쓸려 모두 없어진 것 같지만 그날들은 하나도 지워지지 않고 나의 가슴에 둥지를 틀어 그 누구도 침노할 수 없는 견고한 성이 되고 나만의 자산이 되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준다. ∥「코스모스」 중에서

작가의 말처럼 나를 생기롭게 할 자산은 무엇일까? 내 아버지도 꽃을 좋아하셨다. 덕분에 우리 집은 계절마다 즐길 수 있는 꽃이 많았다. 산수유, 목련, 백합, 붓꽃, 능소화, 금낭화, 수국, 불투화, 과꽃, 채송화, 무궁화, 국화…. 그중 최고는 함박꽃이었다. 봄이 시작되면 함박꽃이 빨리 피기를 고대했다. 뒤뜰 가득 새벽이슬을 머금은 함박꽃이 반짝일 때면 색색으로 벙글어지는 꽃을 골고루 꺾어서 담장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대문을 나서면서 살짝 가져가면 꽃을 꺾지 말라는 아버지 눈을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보다 눈이 유난히도 반짝이던 영어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철부지였다. 훗날 아버지는 그것을 다 알고 있었노라고. 하는 짓이 귀여워서 그냥 두었노라고 하셨다. 지금도 나의 뜰에는 함박꽃이 가득하다. 그 꽃으로 봄마다 아버지를 초대하고 영어 선생님의 빛나는 눈동자도 만날 수 있어서 마냥 설레는 봄이다. 이런 빛나는 추억이 아닐지라도 슬픔과 고통조차 추억이라는 옷을 입으면 귀한 자산이 될 것이다.

유대 금언집 「탈무드」에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란 신의 사랑에 버금가는 자애로 자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딸을 지탱해주었던 큰 산은 어머니 목경희였다. 박혜신이 위암으로 투병 중인 어느 날,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5층 베란다를 뛰어내려 목숨을 끝내고 싶었을 때 어머니의 사랑이 다시금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어머니는 내 등을 어루만지며 ‘내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라고 하시며 비로소 참고 참았던 오열을 터뜨리셨다. 그 처절한 어머니의 절규 소리는 잠자던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중략)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피맺힌 절규 속에서 이 세상 자식 가진 모든 부모들의 처절한 사랑을 느낀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중에서

그녀는 떠나기 3일 전까지 남겨질 어린 두 딸과 어머니, 남편과 가족들, 친지들과 친구들에게 딸의 담임 선생님에게도 편지를 남긴다. 그녀를 사랑했던 이들, 특히 어린 두 딸이 그녀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지침서가 되었을 것이다.

때론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 더 그리울 때가 있다. 옷깃을 스친 인연조차 없지만 다가가 두 팔 크게 벌려 안아드리고 싶은 사람. 말없이 옆에 앉아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내 어깨를 내주고 싶은, 목경희 수필가, 그리고 그녀의 고명딸 박혜신 선생님. 그녀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두려움을 극복한 평안으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이 일기와 편지에 가득하다. 죽음 앞에서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고 소망하다가 죽음이 또 다른 생명의 길임을 깨달은 지혜. 남겨지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자세가 본보기가 된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삶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때 뒷정리를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길 수 있다면 그 죽음은 축복일 것이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한 장의 연서를 쓰고 있을 그대가 보인다.

∥글 이진숙(수필가)
― 전직 고교 국어교사로,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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