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심을 지닌 땅

언론에 비친

[전북대신문  20231012]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 대학부문 당선작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3-10-12 12:53
조회
135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이성재 대진대 문헌정보 4

 

5살 때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한 집회에 나갔다. 무슨 집회인지도 모르고 참석했다. ‘노인 시험 반대’라는 작은 피켓을 들고 많은 사람 무리 안에 서 있었다. ‘노인 시험’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왜 이것 때문에 부모님이 회사를 나가지 않고 참여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성철아 이건 너도 꼭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추워도 조금만 참자 알겠지? 다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 말을 듣고 이 집회에 내가 참석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아직 어리기에 ‘맛있는 거’ 한마디면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그날은 맛있는 것을 일찍 먹지 못했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시간인 대략 6시가 돼도 부모님은 그곳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굶주려서 배고픈 배를 잡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 언제 가?”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날 어머니의 표정은 매섭게 날이 서 있었기에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녁 8시가 되자. 경찰이 우리를 막고 있었다. 혼동이 왔다. 부모님은 경찰은 우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막고 소리를 지르고 밀어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마치 폭력이라도 쓸 기세로 각을 잡고 윽박질렀다.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인가. 그러면 부모님도 나쁜 사람인가. 왜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가치관에 혼동이 왔다.

저녁 9시가 되고 나는 눈에 띄게 지쳐있었다. 아버지는 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보았다. 그리고 결심이라도 한 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미소를 감추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웃는 것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피켓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돈가스 전문점 식당을 찾아갔다. 먼저 수프가 나왔다. 부모님은 후추로 간을 쳐서 드셨지만, 어린 나이의 나는 아직 입에 맞지 않는 향신료이기에 넣지 않고 따뜻한 수프를 숟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입으로 넘겨 식도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따뜻함이 몰려왔다. 추위를 녹여주었다. 곧이어 소스가 듬뿍 뿌려져 있는 돈가스가 나왔다. 나는 부모님이 수저를 올릴 때까지 손으로 수저를 잡지 않았다. 이윽고 부모님이 수저를 잡자 나도 수저를 잡으면서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이 소리는 아까 피켓을 들며 내가 외치던 말과는 다르게 진심이 느껴져 있었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돈가스는 썰어져 나오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내 접시를 자신의 앞쪽으로 가져가서 잘라주었다. 손을 보니 추위 때문인지 살갗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연민이나 불쌍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로지 돈가스가 좋았고 썰리는 돈가스를 보면서 웃고 있었을 뿐이다.

돈가스를 다 먹고 차를 탔다. 여전히 밖에는 추웠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까 그 사람들은 이 눈을 맞으면서 왜 그 짓(어쩌면 나쁜 짓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궁금함에서 그치기로 하고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을 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TV를 틀기만 하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기도 했고 가끔은 욕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과일을 깎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TV에서는 거의 매일 똑같은 소리가 반복되어 나왔다. 내가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노인 시험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법안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노인 시험’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 말이 나오고서부터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댁에 가는 날이 많아졌다. 참고로 우리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100일 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곧 죽을 것처럼, 정확히 말하면 앞으로의 수명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 말씀하셨다. 외할아버지댁에 갔다 오면 예전에는 나를 불러 소파에 앉힌 후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었는데 ‘노인 시험’이라는 것이 생긴 후부터는 그러지 않고 착잡한 표정을 띠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

14살이 되고 ‘노인 시험’이라는 것을 자세히는 아니지만, 알게 되었다.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본다고 했다. 그 시험이 무슨 시험인지는 잘 모른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외할아버지댁으로 데리고 갔다. 차를 타고 가던 도중 어머니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외할아버지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아 성철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좋아하지도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외할아버지와의 교류가 평소에 많지도 않았기에 그만큼 정이 크게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때의 내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에게 공감하는 정도에 그쳤다.

외할아버지댁에 도착하면, 그 아래에는 슈퍼가 있었다. 슈퍼에 겨울에는 연탄난로가 계속 가동 중이었다. 나는 외할아버지댁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 연탄난로 위에 과자를 구워 먹었다. 집에 와서 프라이팬에도 해보았지만, 그 맛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과자를 마음껏 집어 가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촌들에게는 먼저 선뜻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직 할아버지에게 박혀있는 남아선호 사상 때문이었다. 사촌들은 신기하게도 전부 여자였다. 누나나 여동생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나를 아꼈다.

그날도 다르지 않게 과자를 구워 먹고 있었다. 손을 델 때도 있어서 할아버지는 나를 위해 과자를 손수 구워주는 날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애주가였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 종류의 술을 즐기시지는 않았고 오직 소주만을 고집하셨다. 소주를 마시면서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대부분은 발음이 좋지 않아 나는 그저 ‘예’라고 대답하면서 넘겼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강조하지도 힘을 주어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 말 한마디는 잊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학원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네 엄마는 그걸 모른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말했다.

“무슨 학원이요? 할아버지가 공부해요?”

자칫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어린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셔서 대답 해주셨다.

“할아버지가 곧 시험을 보는데 오늘 모의고사라는 걸 봤어. 근데 성적이 좋지 않아.”

“성적이 안 좋으면 어때요. 너무 실망하지 마요. 할아버지.”

위로의 뜻으로 말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나이를 잘 알지 못했기에 노인 시험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중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고등학교 졸업을 따는 검정고시일 줄 알았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실망해서 뭐 하냐.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아 그리고 여태까지 한 말은 비밀이다? 알겠지?”

과자를 한 봉지 더 건네면서 말씀하셨다. 그 과자봉지를 받았고 뜯자마자 할아버지가 하나씩 손수 구워주셨다.

과자를 다 먹고 손을 털었다. 남은 기름기는 그냥 바지에 쓱 묻혀서 닦아냈다. 곧이어 2층에서 어머니가 내려오셨고 할아버지와 얘기를 조금 나누셨다. 그동안 나는 밖에 있는 정자에 앉아있었기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20분 정도가 지나고 어머니는 밖으로 나오셨다. 아버지도 2층에서 내려오셨다. 우리는 같이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가 운전하셨고 어머니는 조수석에 나는 뒷좌석에 탔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었다.

“오늘 할아버지랑 무슨 얘기 했어?”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할아버지가 얘기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냥 과자 구워주시면서 마음껏 고르라고 그러셨어.”

어머니는 웃으면서 조수석에서 팔을 뻗어 나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좋겠네.”

분위가 좋은 채로 집으로 향했다. 곧이어 집에 도착했고 시각은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을 일찍 자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침실로 들어가 잠을 잤다.

*

 

15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도 되는 듯이 나를 데리고 한 학교로 향했다. 두 분 다 오늘 연차를 내셨다. 물론 연차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지만, 일을 가지 않고 쉰다는 것은 알고 있다. 차를 타고 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두 분 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엄숙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차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학교 안에 있는 운동장에 주차했다. 부모님은 하염없이 학교 창문만을 바라보셨다. 내가 나와 있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성철아 차 안에 들어가 있어. 춥지?”

“엄마는 안 추워?”

“괜찮아. 좀 있다 들어갈게.”

차 안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자. 어머니가 창문을 두 번 두드렸다. 나오라는 일종의 행동이었다.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니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곧이어 학교의 종이 울렸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학교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기뻐하셨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웃으면서 할아버지를 축하해주었다. 주위에는 이모들과 삼촌 그리고 사촌들도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핸드폰을 켜서 한 웹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쪽지 같은 것을 꺼내 어머니에게 건네주었다. 어머니는 그 쪽지를 받자마자 펼쳐서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숫자들과 대조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표시와 빗금 표시가 이어졌다. 쪽지에 있는 모든 숫자에 그 표시들이 채워졌을 때 어머니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두 번 세 번 연달아 계속했다.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말씀하셨다. 이모들과 삼촌은 그 계산기에 있는 숫자를 보더니 같이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촌에게 잠깐 밖에 있는 공원에 있으라고 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와서 공원으로 향했다. 누나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와 동생들은 아무 생각 없이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도착하고 1시간 정도가 지나자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께서 돌아오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다른 사촌에게도 그 문자는 전달됐다. 나와 여동생들은 밖은 추웠기에 웃으면서 들어가려 하자 누나들이 웃지 말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무서워서 표정을 풀고 잔뜩 움츠려서 걸어 들어갔다.

들어가니, 식탁에 소주 2병과 이모들과 이모부들 그리고 삼촌과 부모님이 앉아서 웃지 않은 채 식사하고 있었다. 나와 사촌들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간이 식탁에 있는 밥을 먹었다. 평소라면 거실에서의 식사가 언제나 시끄러웠다. 웃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이모부들이 정치에 관해서 토론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밥을 다 먹고 옆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나를 깨웠다.

“이제 가자 성철아.”

어머니의 말에는 아무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아무 말이 없었으며,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전혀 그런 이유가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방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있는 것뿐이었다.

3일이 지나고 어머니는 나를 거실로 불렀다. 맞은편에는 아버지가 앉아있었고 어머니는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있었다. 앉자마자 내 앞에는 소주잔이 하나 있었다. 그것에 어머니는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어른이 줄 때는 두 손으로 받고 마실 때는 고개 꺾어서 마시고.”

그 말에는 진지함이 담겨있었다. ‘어른이 주는 술’에 대해서 진지함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진지함이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곧 돌아가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경우는 비록 길게 살진 않았지만,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 할아버지와의 추억이나 기억을 나열해서 말했다. ‘응’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술을 따라주었지만, 나보고 마시라고 하지 않았다. 술은 따뜻하게 식어갔다. 상온에 가까워진 술은 내 앞에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는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냉장고로 향해 한 병을 더 꺼낸 다음 마셨다. 그것도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 마시고 한 병을 더 꺼내오려 하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말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고 아버지 품에 안겼다.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났고 다음 날 일어난 어머니 눈은 퉁퉁 불어 있었다. 그 상태로 출근하셨지만, 일을 다 하지 못하고 2시쯤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관에 누워있고 가지런히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모들과 이모부들 그리고 부모님은 울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 혼자 울고 있지 않았다. 슬픈 감정도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성철아 슬프지 않아?”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하얀 천에 점점 둘러싸이고 있었다. 그동안 밖에서는 기독교에 관한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마치 찬송가처럼 말이다. 물론 찬송가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들렸다.

다시 기억나는 것은 그 과정이 끝나고 팔에 완장을 차고 있는 삼촌이 보였다. 조문객들이 올 때마다 삼촌은 일어나서 절을 했고 다시 조문객이 할아버지의 사진에 절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 모두 밥을 먹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배고팠지만, 밥을 먹으면 안 되는 것 같아 따라서 밥을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성철아. 밥 먹어.”

곧이어 육개장과 편육 그리고 다른 반찬들이 내 식탁 앞에 차려졌다. 그곳에서 게걸스럽게 먹을 수는 없기에 깨작깨작 조금씩 조금씩 먹었다. 그런데도 반 공기를 남겼다. 3일이 지나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3일이 지났으니 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씀뿐이었다. 학교에는 미리 다 얘기해 두었다고 말씀하셨다.

학교에 도착하자 친구들이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괜찮았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도 나를 따로 불러 여러 가지를 질문했지만, 형식적인 것들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슬픔은 2주일 정도밖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질문 세례도 끝났다. 2주 동안은 어머니의 질문이 무서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웠다기보다 거리를 두고 싶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니의 질문은 대부분 할아버지와의 추억들과 보고 싶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보고 싶어.”

할아버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혀져갔다. 먼저 할아버지의 슈퍼와 집을 삼촌이 팔았다. 대충 들었을 때 이모들은 팔지 않으려고 했지만, 삼촌이 막무가내로 판 것이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삼촌은 할아버지를 잊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말하기를 돈에 눈이 멀어 할아버지 집을 팔아 넘겼다고 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 할아버지의 슈퍼와 집을 판 돈으로 새로운 집을 장만한 삼촌의 집에 모였다. 위로 4명의 누나만 있었기에 숙모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삼촌을 미워한 이모들의 마음이 숙모로 향했기 때문이다. 삼촌의 집에 모이면 숙모에게 과일이나 반찬 밥을 차려오라는 둥 제사 때 상에 올릴 음식에 관해서도 뭐라고 했다. 그러자 나중에는 숙모가 삼촌과 함께 이모들의 뒷말한 것이 들통나서 사이는 더 멀어졌다.

그 이후로 나에게 바뀐 것은 이제는 억지로 사촌들과 같이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과 이모들의 관심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촌들은 전부 인천에 모여 살았지만, 우리는 파주에 살았기에 친해질 수 있는 거리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 반말을 했지만, 나 혼자 존댓말을 하면서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슬픔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노인 시험으로 인한 할아버지의 사형으로 인한 사망은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노인 시험은 앞으로 잊혀질 거로 생각했다. 부모님의 나이도 아직 40세이시고 나 또한 15살인 어린 나이이기에 너무나도 먼 미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쩌면 현실도피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맞이하는 순간 노인 시험을 보기 전까지 피를 말리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

39살이 되었다. 부모님은 노인 시험을 볼 나이가 다가왔다. 이제 1년밖에 남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갑이었기에 노인 시험을 보는 날짜도 같았다. 회사에 다니면서 여태까지 모아둔 돈으로 부모님을 노인 시험 학원에 보냈다. 부모님은 여전히 일하셨지만, 퇴근하고 나서 4시간 정도를 공부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인 시험에 뭐가 출제되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기에 그저 학원에 보내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1년 정도가 남았을 때 불안함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학원에서만 배운 대로 열심히 공부하면 잘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버지는 대충대충 했다. ‘이까짓 시험이야 내가 통과 못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 아버지를 말리며 제발 공부 좀 하라고 했지만, 간절하게 말리지는 않았다.

내가 39살이 되었을 때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인 시험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노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애도하는 반면에 지금은 통과하지 못하면 ‘그것도 통과 못 하는 노인은 사회에 쓸모가 없으니 죽는 게 마땅하다.’라는 인식으로 바뀌었다.

어제는 학원에서 문자 한 통이 왔다.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모의고사를 봤습니다. 조기 귀가했으니 보호자께서는 확인 부탁드립니다.’ 조기 귀가했어도 시간은 저녁 7시였다. 어머니에게 먼저 전화했다. 통화음이 세 번 간 후 연결됐다.

“엄마. 오늘 시험 잘 봤어?”

“응. 엄마는 잘 봤지. 근데 아빠는 모르겠다.”

“같이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빠는 잠깐 친구들 만나러 나갔어.”

“알았어. 내가 따로 전화해 볼게.”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은 술을 한잔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 얘기는 좋은 일이 있거나 아니면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걱정이 조금 됐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오늘 시험 봤다며 잘 됐어?”

“어. 아들 아빠 시험 잘 못 봤어.”

“통과는 된 거지?”

“아쉽게 통과 못 했어.”

“그러니까 잘 좀 보라 했잖아. 공부 계속 좀 열심히 하고 응? 이러다 통과 못 하면 난리도 난리가 없어. 술 마실 시간이 어디 있어? 빨리 집 들어가서 복습 좀 해.”

아버지는 대충 듣기 싫어하는 티를 내면서 말씀하셨다.

“알았어. 알았어. 끊을 게 아들.”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말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일도 싫었고 사생활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침해받는다고 생각이 들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학생 때 4년 동안 연애를 한 적도 있었고 그 이후로도 3번 정도를 해보았지만,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끔은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집에 키우는 반려견이 있어 괜찮았다.

부모님의 노인 시험이 6개월이 남았을 때는 걱정이 많이 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점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아서 괜찮았지만,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합격에 간당간당하게 합격점에 걸치는 아버지가 문제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를 따로 불러서 한마디 했다. 주로 노인 시험공부와 관련된 말이었으나 가끔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저 미안하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1개월이 남고 마지막 모의고사가 치러졌다. 그날은 점수를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연차를 내고 부모님 집으로 갔다. 먼저 어머니의 사전채점표를 가져와서 채점했다. 어머니는 100점 만점 중 92점으로 합격점인 70점보다 높은 점수로 통과해서 마음이 놓였다. 이번에도 문제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사전채점표를 확인해보니 68점이었다. 통과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당장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했잖아! 왜 내 마음을 이렇게 졸이게 만드는데…. 일을 당분간 쉬고 당장 공부에 집중해. 돈은 내가 최대한 보내줄 테니까!”

어머니는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 생전 태어나서 이렇게 크게 소리쳐 보기는 처음이었고 이렇게 크게 화를 내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 없으셨고 그대로 앉아서 들으면서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노인 시험을 치르는 날이 다가왔다. 연차를 내고 학교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운동장에 주차하고 차 밖에서 눈을 맞으면서 서 있었다. 부모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종이 울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1초는 1분 같았고 10분은 10시간 같았다. 이윽고 1시간이 지나자 종이 울렸다. 종이 울리는 순간, 마치 종말이라도 찾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가 먼저 학교 밖으로 나오셨다. 우리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 나왔다. 벌써 느낌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채점하기 전 한식당으로 갔다. 코스요리가 나오고 인당 8만 원 정도 하는 그렇게 비싸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급요리 전문점이었다. 말이 없이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성철 아빠 시험 잘 봤지?”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나온 음식을 깨작깨작 먹었다. 어머니는 대화 화제를 돌리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오히려 독이었다. 목구멍으로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잘 넘어가지 않았다. 코스가 나올 때마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 때마다 애간장이 탔다.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사전채점표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확인해야 했다.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말했다.

“아빠 채점표 보여줘.”

아버지는 등을 돌린 채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등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어깨를 잡고 등을 강제로 돌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미 채점한 뒤였다. 채점표에는 빗금이 많았다. 그 순간 직감했다. 아버지는 눈물을 조금 흘리고 계셨다.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안았다. 그리고 말없이 울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머니도 들어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머니는 시험에 통과하셨다. 아버지는 통과하지 못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2주였다. 2주 뒤에는 발령 나는 병원으로 가서 안락사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 2주를 우리는 값지게 쓰기로 했다.

먼저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회사에 바로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언제 수리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차를 끌고 주차한 다음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갔다. 부모님은 일을 그만두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님과 같이 먼저 식당을 갔다. 평소에 좋아하시는 한우 오마카세 집에 갔다. 인당 20만 원 정도 하는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안심과 등심을 먹었다. 아버지와 나는 술 한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웃었다. 울 수는 없었다. 남은 시간을 우울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에 내가 물었다.

“아빠 더 하고 싶은 거 있어?”

“글쎄다. 그냥 아들이랑 계속 같이 있고 싶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TV를 틀었다. 예능을 보면서 얘기했다. ‘쟤는 저렇다. 쟤는 이렇다.’ 연예인을 품평하기도 했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저녁에는 맥주와 치킨을 시켜서 먹었다.

그다음 날에는 무작정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러 갔다. 한겨울이었지만, 차 안은 따뜻했다. 그대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해운대를 구경하기도 했고 자갈치 시장으로 들어가서 비싼 방어를 먹고 일반 소주가 아닌 전통주를 마셨다. 액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후 온돌방을 잡아서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온돌방은 따뜻함을 넘어 거의 뜨거워서 주인에게 말해 온도를 낮춰달라고 할 정도였다. 하루하루 추억이 쌓이는 만큼 그 하루하루가 점점 더 다가와졌다. 집으로 다시 올라가던 도중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성철아 나 죽으면 장례식은 치르지 마라. 요즘 인식이 그렇잖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줄 생각이 있던 내가 대답했다.

“알았어. 우리끼리만 알고 있을게.”

남은 기간이 전부 지나고 아버지는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와 함께 말이다. 안락사실에 도착하자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고 아버지 혼자 쓸쓸하게 들어갔다. 뒷모습이 정말로 차가워 보였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를 크게 불렀다.

“아빠!”

아버지는 등을 돌아 보이셨다. 입꼬리는 올라가서 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눈은 울고 계셨다.

“성철아. 성철 엄마. 나 먼저 가볼 게 사랑해.”

그대로 아버지는 들어가셨다.

*

65세가 되었다. 어머니는 87세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3년 전이다. 암이나 투병하지는 않았다. 자연의 순리대로 돌아가셨다. 나는 노인 시험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2년 전 일이었다. 일을 예전에 그만두고 조그마한 편의점을 하나 운영했다. 편의점은 생각보다 돈이 안 되었다. 그렇지만 나 하나 먹고 살기에는 충분했다.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노인 시험을 준비해야 하니 시간이 많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더 구해서 돈을 조금 더 적게 벌더라도 학원에 등록하기로 했다.

학원에 등록해서 열심히 다니면서 공부하던 날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 학원에 다니고 있는가. 내가 합격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단순히 생존 본능 그것 하나 때문인가 말이다. 주변에 응원하는 이도 없었고 삶의 낙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사춘기라도 온 것처럼 방황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학원에 계속 다니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고 65세가 되었을 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험은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모의고사를 쳤을 때 82점으로 합격점인 70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학원 상담사는 적어도 90점은 넘어야 안전할 수 있다며 조금 더 열심히 해보라고 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열심히 할 이유가 없었다. 자연의 순리대로는 아니지만,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었다. 허탈했다. 이 시험 하나가 나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권리를 가졌다는 게.

결국, 시험이 2주 남았을 때 학원을 그만두었다. 여태까지 보관해왔던 부모님의 뼛가루를 바다에 뿌렸다. 그리고 낚시를 했다. 뼛가루 때문인지는 몰라도 물고기들이 많이 몰려왔다. 물고기를 잡았지만, 먹기에는 꺼려져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 주었다.

낚시하고 집에 오고 그런 생활을 반복하자 시험 날짜가 다가왔다. 학교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할아버지도 부모님도 나도 시험을 보는 날에는 눈이 내렸다. 마치 미끄러지기라도 원하는 것처럼. 학교 안으로 들어가서 배정된 반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 긴장한 상태였다. 딱 봐도 몸이 굳어있는 사람도 보였고 애처럼 발을 덜덜 떠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하게 편했다. 마음을 놓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냥 편했다. 시험지가 배부되고 컴퓨터 사인펜으로 답안지에 표시했다. 문제는 어려웠다. 그러나 막막하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시험이 종료되고 학교 밖을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기다리는 이들이 모두 있었다. 하지만, 나를 데리러 오거나 맞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 뒤 시험 점수가 나왔다. 나는 사전채점을 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맞지만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수는 68점 불합격이었다. 슬프지도 좌절되지도 않았다. 다시 일주일 뒤 병원을 찾아갔다. 어떻게 찾아왔냐는 물음에 노인 시험에 불합격했다고 말하자 직원은 조금 인상을 썼다. 그리고 나에게 안락사실로 찾아가라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앞에 도달했다. 고개를 위로 들자 주변에는 울면서 포옹하는 가족들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혼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고 병실에 누웠다. 곧이어 링거를 팔뚝에 꽂았고 주사를 넣었다. 눈이 서서히 감기면서 몸에 힘이 풀어졌다.
전체 5,38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5236
[전북대신문  20231012]심사평 / 가람이병기청년시문학상 대학부문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119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119
5235
[전북대신문  20231012]수상소감 / 가람이병기청년시문학상 대학부문 당선자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113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113
5234
[전북대신문  20231012]수상소감 / 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 대학부문 당선자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90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90
5233
[전북대신문  20231012]수상소감 / 가람이병기청년시문학상 고등부문 당선자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99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99
5232
[전북대신문  20231012]수상소감 / 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 고등부문 당선자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85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85
5231
[전북대신문  20231012]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 대학부문 당선작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135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135
5230
[전북대신문  20231012]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 고등부문 당선작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168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168
5229
[전북대신문  20231012]가람이병기청년시문학상 대학부문 당선작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97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97
5228
[전북대신문  20231012]가람이병기청년시문학상 고등부문 당선작
최명희문학관 | 2023.10.12 | 추천 0 | 조회 152
최명희문학관 2023.10.12 0 152
5227
[광주일보 20231010]광주문학관, 그 정신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최명희문학관 | 2023.10.11 | 추천 0 | 조회 319
최명희문학관 2023.10.11 0 319
5226
[시대일보 20231010]의성교육지원청, 2023 탑리여자중학교 전주한옥마을 문학기행
최명희문학관 | 2023.10.11 | 추천 0 | 조회 147
최명희문학관 2023.10.11 0 147
5225
[경북일보 20231010]의성 탑리여중, 전교생 전주한옥마을 문학기행 실시
최명희문학관 | 2023.10.11 | 추천 0 | 조회 138
최명희문학관 2023.10.11 0 138
5224
[경북신문 20231010]의성 탑리여중, 전주한옥마을로 문학기행 다녀와
최명희문학관 | 2023.10.11 | 추천 0 | 조회 108
최명희문학관 2023.10.11 0 108
5223
[대경일보 20231010]문학과 함께 과거로 떠나는 여행 2023 탑리여자중학교 전주한옥마을 문학기행
최명희문학관 | 2023.10.11 | 추천 0 | 조회 108
최명희문학관 2023.10.11 0 108
5222
[전북일보 20231007][최명희문학관의 어린이손글씨마당] 70. 전학생 온 날
최명희문학관 | 2023.10.07 | 추천 0 | 조회 268
최명희문학관 2023.10.07 0 268
메뉴
error: 콘텐츠가 보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