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살소살

삶을닮다(오늘의필록)

지각의 이유

작성자
Oz
작성일
2007-07-05 16:07
조회
3195

지각 이유


며칠 째 지각이다. 글줄이나 끼적인다는 핑계로 자정을 훌쩍 넘기기 일쑤고 잠시 눈만 감고 있겠다면 책상에 누워있다 깜박 잠이 들어 늦잠을 자기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익어갔다. 자명종과 휴대전화에 알람까지 맞춰보지만 내 귀는 감미로운 자장가로 듣고는 무시한다.

지각을 하지 않겠다며 다시 알람을 맞추고 친구 3명에게 모닝콜을 부탁한다.

「오늘은 꼭 일찍 자야지.」

굳게 다짐하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책상 앞에 앉아 자정을 넘겨서야 잠을 잔다.

알람과 친구 3명의 전화를 받은 시간, 7시

평소와 마찬가지로 알람은 자장가 역할을 충실히 했다. 첫 번째 친구의 전화, 계속 '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째 전화, 일어났다는 거짓말로 넘어간다. 세 번째 전화,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친구 녀석과 5분간의 사투. 일어났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하고 동요 한 곡을 다 부르자 친구가 전화를 끊는다. 멍하니 침대에 한참을 앉아있다 시계를 보고는 어리떨떨한 정신이 번쩍 든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문학관으로 출발한 시간, 7시30분
내가 일하는 곳은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최명희문학관이다. 집에서 버스를 타면 15분, 택시로는 5분 거리다. 가까운 곳에 살면 더 게을러지고 지각을 많이 한다는 말이 맞다. 몇 달 정도 익산에서 전주로 출근 했을 때와 다르게 전주로 오면서 지각이 잦아졌으니 말이다.

여유 있게 버스를 탄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버스가 재래시장을 지나자 차창 밖 시장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이 보인다. 저들은 언제부터 나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자신이 좀 한심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 음악을 끄고 세상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우선 시장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먼저다. 물건 내리는 아저씨 소리가 이어지고 좌판을 여는 할머니 소리, 북적북적 사람 소리 그리고 아침 햇살이 떨어져 반짝이는 소리까지 어우러져 연분홍 음악을 만든다.

한옥마을 도착 시간, 7시 50분

9시 15분까지 출근에 10시 개장,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바로 출근을 할까 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아침시간을 좀 더 나에게 투자하고 싶어졌다. 더 그럴듯한 변명이라면 연분홍 음악이 날 감성적으로 변화시켰다.

우선 경기전이다. 경기전 앞 하마비가 먼저 보인다. 경기전의 하마비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왕조시대에 말을 탄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갈 때에는 누구나 말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겨 세운 비석, 하마비.'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경기전의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 모습이 다르다. 판석 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한 쌍의 동물이 등으로 받치고 있다. 동물은 불법의 수호자 맹수의 왕인 사자, 경기전의 수호신으로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수컷과 입을 다물고 있는 암컷이 같이 있다. 암수가 같이 하는 까닭이야 음양의 조화겠지만 밤낮으로 경기전을 지키는 사자가 긴긴밤 홀로 외롭지 않게 하기위한 선조의 배려로 보면 더 좋을 듯하다. 수컷이나 암컷이 홀로 있다 제 짝을 찾겠다며 사라지면 큰일 아니겠는가.

경기전 왼쪽 문을 통해 경기전 안으로 들어간다. 경기전 안에는 내 몸통보다 두꺼운 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이 나무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까? 그렇다면 수많은 일들을 보고 들었을 것이다. 나무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보다 못하겠냐 싶어 손으로 나무를 만져본다.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생채기들이 손을 통해 느껴진다.

「이 생채기가 바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겠지. 아프고 또 아파하며 눈물로 이 자리를 지키겠지.」

비둘기 따라 경기전 밖으로 나온 시간, 8시 30분

경기전 후문으로 나와 오목대로 향한다. 역사적인 이유보다 한옥마을을 한 눈에 보고 싶다는 생각에 높은 곳을 생각했다. 중턱 쯤 올랐을img.php?img=4f31ce44291145a711a708bdc9fc707b.JPG&id=14500 때 한옥마을과 전동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질적인 두 건축 양식이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백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서로 어울리는 법을 터득한 걸까? 시간이 만든 닮은꼴, 오래된 것은 낡고 닳은 것 하나만으로도 조화를 이룬다.

기와로 만든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다. 햇살을 머금고 있는 기와지붕은 형형색색이다. 내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곳으로 햇살이 비치면 비치는 곳에 따라 변한다. 기와는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등 자기만의 독특한 색을 지니고 있다. 붉은색이라 해서 다 같은 붉은색도 아니다. 짙붉은, 엷붉은, 검붉은, 푸른빛이 도는 붉은, 분명 붉지만 그 각자마다 또 다른 색을 지닌다.

이상한 상상을 해본다. 한옥에 사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지붕도 주인을 닮아가는 것이다. 검은 기와에 사는 사람은 매우 단정한 사람, 붉은 기와에 사는 사람은 열정적인 사람. 그 열정에 따라 붉은 기운이 더 붉어지기도 하고 엷어지기도 한다. 문학관의 검은 기와는 언제쯤 붉어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빨리 문학관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빛깔에 취해 한옥마을 안으로 들어간 시간, 9시

한옥은 향기도 다르다. 멀리서 느끼지 못했던 향기가 느껴진다. 사람은 자신만의 체취가 있다. 그래서 체취만으로도 사람을 구별하고 친근감을 느낀다. 이곳은 마치 사람마냥 각자의 체취가 있다.

「빨간 벽돌집 살라고 한지 엊그제여. 근디 인자 기와집서 살라고 돈을 준다더만.」

「하이고, 천장이 겁나게 높아 번징게, 어지럼병 걸리는 것드만.」

할머니들의 기분 좋은 투정을 뒤로 하고 경기전 쪽으로 다시 길을 잡는다. 출근 시간까지 몇 분 남지 않아 발걸음을 서두른다. 그래도 여전히 조금 여유가 있다 싶어 직진하지 않고 경기전 담을 타고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시간과 사람을 생각하며, 9시 20분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지각이다. 다른 때보다 한 시간 이상을 일찍 일어났고 도착했지만 지각이다. 경기전 담을 타지 않고 골목으로 직진했다면, 빨리 뛰었다면 지각은 면했을 것이다. 뻔히 지각 할 것을 알면서도 뛰지 않았다. 뛸 수가 없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경기전 담벼락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만졌다고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앞의 시간에 살던 그 사람들이 한 것처럼 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 뒤의 시간에 오는 그 누군가를 위해 정성들여 밟아갔다. 뒤의 시간에 오는 이, 내가 걸었던 이 길을 정성스레 밟아주기를 기대한다.

오늘도 지각의 이유를 생각하며 문학관 문을 활짝 열어본다.

5월 27일 (3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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