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살소살

삶을닮다(오늘의필록)

고창 기행 2 … 괜스레 달떠있습니다.

작성자
Oz
작성일
2007-10-28 09:44
조회
2272

… 괜스레 달떠있습니다.

고창 선운사는 백제시대 검단선사가 용을 몰아내고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노을에 깃들고 구름에 머무르면서 참선 수도하여 선정의 경지를 얻고 모든 번뇌를 타파한다."라는 뜻으로 선운사라 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선운사로 오는 까닭은 노을에 깃들고 구름에 머물고 싶어서 일 것이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떤다고 떨었는데 그래도 늦은 감이 있다. 토요일이라 관람객과 등산객이 많을 것인데 더 일찍 나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고창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창 밖 풍경을 찍어보기도 한다. 혼자 하는 여행이 썩 불안한 모양이다.

낯설음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가지고 온다. 기분이 묘하게 달떠있다. 선운사까지 걸어볼 요량이다. 걸어서 한 시간라면 충분해 보인다. 무턱대고 이정표만 보고 걷기 시작한다. 부사리 같은 난폭한 운전자만 빼면 기분 좋은 출발이다.

기암괴석뿐 아니라 철산서해바다와 변산반도가 한눈에 보여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린다는 도솔산(선운산의 본디 명칭이 도솔산이고 나 역시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도솔산이라 부르겠다.), 산의 형세가 만필의 말들이 뛰어 오르는 형상이고, 뭇 신하들이 임금과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며 또 만물의 근원에 돌아간 신선이 모이는 형상이라 한다.

선운사 입구에 유주(乳柱)가 달린 은행나무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가 있어 그런지 은행나무에만 눈이 간다.

오래된 은행나무에서만 가끔 볼 수 있는 유주는 가지에서 땅 쪽으로 마치 종유석처럼 자라난 돌기를 말한다. 이는 공기 중에 숨 쉬는 이른바 기근(氣根)의 일종이다. 대개 줄기에서 자란 큰 가지에 여인의 유방처럼 밑으로 늘어진 혹이 달리는데 아이를 낳고 젖이 잘 나오지 않은 출산부가 치성을 드리면 젖을 나오게 해준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도솔산(선운산) 농협판매장 앞에 자리한 은행나무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서 유주 10여개가 보인다.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를 배고프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안타까움이고 유주 앞에서 치성을 드리는 그 마음은 의심 많은 정성일 것이다.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선운사 초입에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보인다.

선운사 동구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선운사로 가는 산책로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서있다. 나무 사이로 가을 햇살이 간간히 내려올라 치며 나뭇잎이 앞 다투어 햇살을 막아준다. 바람 불어 나뭇잎 흔들리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으니 산이, 나뭇잎이, 바람이, 물이, 사람이, 모두 시다. 참, 시 같다.

동백꽃이 유명한 만큼 도솔산(선운산)은 꽃무릇 군락지로도 유명하다. 그 규모가 우리나라 최대라고 하니 그 모양이 궁금하다. 꽃무릇은 9월에 붉은색으로 만개하는데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 ‘상사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 줄기에서 태어났지만, 잎은 꽃을 못 보고, 꽃 또한 잎을 보지 못한다. 그리움에 절여져 핏빛처럼 붉은 꽃, 한 수도승을 향한 사랑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여인의 한이 맺혀진 꽃. 전설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늦어서 그런 것인지. 꽃은 꽃대만 보여준다. 먼 길을 걸어왔건만 어찌나 야멸치게 거부하던지. 한 번 돌아선 여인의 마음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인다. 사찰로 가기 전에는 반드시 다리가 놓여 있다.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편의시설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찰의 다리는 기능적인 효율성과 함께 사찰 경역을 이상화 하려는 의지와 불국세계를 향한 염원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다리는 현실세계와 피안정토의 경계이자 두 영역을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자 선운사 입구에 사천왕문이 보인다. 본디 야차와 나찰의 왕으로 후일 부처님의 설법으로 감화되어 불국세계를 제일 먼저 지키는 사천왕이 됐다 한다.

“사천왕은 조선에 단 한 위도 같은 상이 없습니다.” (『혼불』9권 中)

예전 같으면 무서워 그냥 지나쳤을 사천왕문을 지나치지 못하고 한 위씩 보기 시작한다.

전체 908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38
감기.
Oz | 2008.01.22 | 추천 0 | 조회 2337
Oz 2008.01.22 0 2337
37
김일주 선생님의 기사가 있어서 ...
Oz | 2008.01.04 | 추천 0 | 조회 4128
Oz 2008.01.04 0 4128
36
고양이가 왔다.
Oz | 2007.12.04 | 추천 0 | 조회 2464
Oz 2007.12.04 0 2464
35
미당 시 문학관 / 늙은 시인의 변명
Oz | 2007.11.18 | 추천 0 | 조회 2490
Oz 2007.11.18 0 2490
34
고창 기행 5 …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지장보살님
Oz | 2007.11.15 | 추천 0 | 조회 2561
Oz 2007.11.15 0 2561
33
고창기행 4 … 웃음의 시왕
Oz | 2007.11.03 | 추천 0 | 조회 2329
Oz 2007.11.03 0 2329
32
고창기행 3 … 뭔 넘의 소원 그리도 많은지
Oz | 2007.10.31 | 추천 0 | 조회 2207
Oz 2007.10.31 0 2207
31
고창 기행 2 … 괜스레 달떠있습니다.
Oz | 2007.10.28 | 추천 0 | 조회 2272
Oz 2007.10.28 0 2272
30
고창기행 1 … 낙화(洛花) 그곳에도
Oz | 2007.10.27 | 추천 0 | 조회 2360
Oz 2007.10.27 0 2360
29
책 사는 재미
Oz | 2007.10.18 | 추천 0 | 조회 2314
Oz 2007.10.18 0 2314
메뉴
error: 콘텐츠가 보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