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채피 여자가 나이 들면 시집이라능 걸 가기는 가얀디, 나는 집도 가난허고, 부모도 멀리 지싱게, 머 부자 혼인은 바라도 못허고, 또 저쪽으서 남자네가 우리보고 가난하다고, 볼 것 없다고 퇴(退)나 노먼 오도가도 못헐랑가, 매급시 그런 생객이 들대요. 에이, 가 보자. 거가 머이 있능가. 허고는 시집이라고 간 거이요. 긍게. 우리 옥란이가 많이 울었지라우. 내가 더 울고. 아이고오, 그런디, 그 담이 바로 지옥이여. 참말로 나, 누가, 너 시집 안 가먼 나 죽을란다고 목을 매도, 누가 시집가라먼 가지 말라고, 나는 도시락 싸들고 댕김서 말리고 싶어라우. 그 일만 허다가 죽어도 좋겄어어. 어치케나 징그런지.
- <혼불> 중에서
최명희(1947~1998)의 소설 <혼불>을 일컬어 세상 사람들은 애처롭도록 가냘프고 뜨겁고 강인한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소설이라고 부른다. 1930년대 말, 전라도 남원땅의 유서 깊은 매안 이씨 문중을 배경으로 무너져가는 종가(宗家)를 지키고자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종부(宗婦) 3대와 남도의 삶과 정신을 이어가는 이름 모를 백성들의 때론 천하고 남루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형상화한 <혼불>은 책으로는 10권, 원고지는 무려 1만2000장에 달하는 역작이다. 작가가 서른다섯 나이에 첫권을 발표해 쉰살이 되어서야 마지막권을 마무리한 필생의 작품이기도 하다.
집필하는 동안 종이에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혼을 새겨 넣는다는 심정으로 글을 대했다는 생전의 고백처럼 <혼불>에는 소설을 뛰어넘는 인간의 시작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서려 있다. 어머니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듯 이 땅에 마을이 생겨나고 민족이 일어난다. 장성한 아이가 어머니 곁을 떠나 그 숭고한 희생과 사랑을 잊어버리듯 어느덧 우리는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일구고 눈물 흘리고 피와 땀을 거름으로 안겨준 고향이라는 것, 근원이라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의 혼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야 말았다.
산이 먼저 목말라하면서 그만 뒤미처 둠벙만한 방죽의 바닥이 갈라져 버리는데, 사람들은 거북이 등짝처럼 터지는 방죽 밑바닥을 보고 있으면 심정도 따라서 터지고, 입술이 말라들어 허연 꺼풀이 일어났다.
본디,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던 매안서원(梅岸書院)의 서원답(書院沓)을 경작하는 데 쓰려고 팠던 손바닥만한 방죽 하나에 의지하여, 여름마다 고초를 겪으면서도 달리 어쩌지 못하고 농사를 지어왔으니, 굳이 농수(農水)만이라고 할 것인가. 마을은 늘 물이 모자랐다. 샘 바닥마저도 걸핏하면 뒤집혀 붉은 흙탕물이 되고 말았다.
- <혼불> 중에서
15년간 <혼불>이라는 작품에 매달리면서 최명희는 작가로서는 영예를 얻었고, 여자로서는 독신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난소에서 발견된 암이 꽃잔디처럼 온몸으로 전이되어 작품을 끝맺은 2년 후 겨울에 ‘거짓이 아닌 글을 썼으니 행복하다’는 말을 남기고 아쉽게도 생을 마감한다.
외로웠으나 누구보다 뜨거웠던 최명희의 삶은 지금도 이 땅 곳곳에 새겨져 있다. 딸을 키우는 어머니, 머잖아 어머니가 될 어린 딸들, 추수가 끝나고 겨울을 기다리는 빈 들판과 나락이 흩어진 논 가운데에, 그리고 말라붙은 강가와 발전이라는 간판 앞에서 깎여지는 산중턱에는 오래 전부터 우리를 지키고 키워낸 조상들의 혼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최명희가 사랑한 남도의 사투리처럼 그 혼은 세월이라는 풍파 앞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올 한해, 참으로 기가 막힌 가뭄에 몸살을 심히 앓았다. 이 가뭄은 생각건대 물이 없어 다급해진 갈증만은 아니다. 거북 등짝처럼 갈라터진 저수지 밑바닥은 우리네 정서이기도 하다. 효(孝)와 예(禮)와 덕(德)이라는 우리네 혼을 상실한 한국인의 마음속도 고초를 겪어 뒤집힌 흙탕물 같다. 그 애달픈 마음을 지켜내려고 모진 한 세월을 온전히 바친 소설가 최명희의 삶이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감사히 여겨지는 연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