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혼불」을 활용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만나다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2-16 13:06
조회
3610

촌스럽게만 여겨지던 내 유년의 언어들…. 소설 「혼불」의 언어는 부모의 말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어둡던 시골길이 떠올랐다. 고향집 앞산으로 혼불이 보였다던 언덕 ‘황서번데기’도 어렴풋했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동네 할매들의 억양도 그대로 들렸다. 외가가 남원시 사매면이고, 친가가 장수군 산서면인 내가 지금은 한벽루와 오목대가 가까운 전주시 서학동에 살고 있으니, 「혼불」의 배경이 온통 내 삶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한숙(화가)

소설 「혼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세밀하게 살핀 화가 한숙은 “지체가 높든 낮든, 행실이 바르든 그르든 이들 모두는 소박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꽃”이라고 말했다. 오래된 폐가에서 한옥 고재(古材)를 구한 그녀는 목각에 색을 입혀 청암부인과 효원, 강모와 강실 등 「혼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꽃으로 피워냈다. 한 작가는 「혼불」이 담고 있는 여러 의미 중에서 민중과 함께 하고자 하는 소설가 최명희의 의지와 작가의식을 먼저 떠올린 것이다. 고재를 다듬어 인물의 형상을 만들고 색을 입히면서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변하는 마음조차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라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라고 자주 되뇌었던 건 이 때문이다.

최명희문학관은 소설가 최명희 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문학인뿐 아니라 서양화가와 동양화가, 판화가, 서예가, 공예가 등 최명희의 삶과 작가정신, 소설 「혼불」에 매료된 전주의 예술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문학관이다. 화가 고형숙·김미라·김윤숙·박시완·유대수·이근수·이주리·장우석·정소라·지용출·진창윤·최지선·황진영, 공예가 권금이·이진화·임채준, 서예가 이승철·여태명, 사진작가 장근범, 목조장인 김종연, 조각가 박승남·신순철 등 여러 분야의 예술인이 최명희문학관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서양화가 최지선은 「혼불」에 쓰인 의성어·의태어를 한 땀 한 땀 바느질했고, 판화가 유대수는 「혼불」의 상징적인 문장을 목판에 새겼다. 한숙은 「혼불」의 주요 인물을 버려진 한옥 고재에 담았다. 고형숙은 책장에 꽂힌 장서들을 떠올리며 최명희의 서재를 수묵화로 표현했다. 화가 이주리와 박시완은 최명희의 초상화를, 고 지용출(1963∼2010) 화가와 서예가 이승철은 소설·수필·콩트 등 최명희의 작품 제목들을 그림과 글로 형상화했다. 화가 이근수는 전시관 조명등 10개를 전주한지로 제작하며 최명희의 문장을 새겼다. 「혼불」 필사본들을 쌓아놓은 ‘혼불탑’은 부부화가인 박승남·김미라가, 청년문학상 참가 작품들을 쌓아 놓은 ‘필사탑’은 공예가 임채준의 작품이다. 문과 창의 꽃장식은 공예가 권금이, 문학관의 꽃 장식은 플라워아티스트 유영의 손길이 담겼다.



○ 최지선 화가가 선사하는 「혼불」의 지문들

최명희는 생전에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라며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정신의 지문’이라고 말했던 아름다운 언어와 치열한 문학정신을 전 10권의 「혼불」과 독자들의 가슴에 깊게 새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혼불」을 통해 순결한 모국어를 재생하고 싶었던 작가의 꿈. 최명희문학관에는 ‘전아하고 흐드러지면서 아름답고 정확한 모국어의 뼈와 살 그리고 미묘한 우리 혼의 무늬를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던 작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전시물이 있다. 「혼불」에 담긴 의성어·의태어들을 만질 수 있는 미술작품으로 탄생시킨 것. 최명희 작가의 ‘혼불’에 담긴 언어들과 보다 쉽고 친근하게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다.
10권 분량의 「혼불」을 펼치면서 막막했던 마음이 작품에 담긴 최명희 선생님의 무궁무진한 표현력으로 사르르 녹게 되었습니다. 「혼불」을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숨바꼭질하듯, 보물을 찾듯, 아끼는 사탕을 녹여 먹듯이 언어들을 챙겼고, 손수 이불을 꿰매고 만들어 주신 어머니의 정성처럼 수를 놓듯 작품 속 모국어들을 새겼습니다. 아랫목의 푹신한 이불처럼 한겨울의 추위를 조금이라도 녹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지선(화가)

서양화가 최지선은 좁고 긴 형형색색의 헝겊 조각들을 겹으로 붙이고 그 안에 솜을 넣은 뒤,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글자를 표현했다. 그 결과, 사르락, 관옥, 바듬히, 우수수, 울멍줄멍, 춘애, 부숭숭, 어씩어씩, 둠벙, 퍼스르르, 고무락거리다, 덩클덩클하다, 너훌너훌, 포르릉 등 「혼불」에 담긴 의성어·의태어들이 작가 특유의 독창적인 작품 18점으로 다시 살아났다. 각각의 글자는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부풀어 올라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입체감을 나타낸다.
  • 사르락: 물건이 쓸리면서 가볍게 나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
  • 관옥: 남자의 얼굴이 아름다움을 비유하여 쓰는 말
  • 잣바듬히: 몸을 약간 뒤로 비스듬히 벋는 모양새를 표현한 부사로 이해됨
  • 우수수: 물건이 한꺼번에 수북하게 쏟아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울멍줄멍: 엇비슷한 체구의 사람들이 많이 있는 모양
  • 춘애: 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 부숭숭: 살이 부어오른 모양
  • 어씩어씩: 어슷비슷하게 늘어선 모양새
  • 퍼스르르: 가루가 뭉친 덩이의 물기가 말라, 쉬이 부서지는 모양의 어감을 살려 표현한 말
  • 고무락거리다: 몸을 느리게 자꾸 움직이다
  • 덩클덩클하다: 덩어리가 물에 완전히 풀리지 아니하고 약간씩 뭉쳐 남아있는 모양새를 가리키는 전라 방언
  • 너훌너훌: ‘나훌나훌’보다 어감이 큰 말. ‘너울너울’과 비교됨
  • 포르릉: 작은 새가 갑자기 매우 가볍게 나는 소리


○ 고형숙 화가가 꾸민 최명희의 방

바깥출입을 거의 삼가고 「혼불」 집필에만 매달렸던 작가 최명희. 그는 반드시 자신의 책상에 정좌를 하고 만년필로 글을 썼다. 원고지 칸칸이 정갈한 글씨로 채워진 초고(草稿)와 오리고 붙인 모양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교정지. 작가는 만년필과 잉크병, 자와 칼, 철끈과 가위를 늘 곁에 두었다. 그가 ‘끝없이 오리고 붙이고 다시 쓰는 과정이 내 작업’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며, 고집스레 만년필을 붙잡았던 것만 봐도 최명희에게 ‘쓰기’가 어떤 의미인지 헤아려진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 그의 방은 어떤 모습일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책으로 가득한 방과 커다란 책상 위 집필의 흔적들이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과 작품 구상을 위한 취재수첩, 메모지, 만년필과 잉크, 오래 묵은 원고지, 그리고 적막.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그 공간에서는 오직 원고지를 새기는 만년필의 미동만이 작가의 존재를 알려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최명희의 방…. 그곳은 다 맞추지 못한 퍼즐 같은 작품 속 이야기들을 수없이 끼워 맞추는 고단한 노동의 공간이었겠지요. 작가 최명희의 서재를 그의 책과 더불어 구성했습니다. 그의 노작(勞作)에 결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형숙(동양화가)

최명희의 서재는 각종 자료와 책들이 빼곡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국어사전을 두었으며, 각종 고문서와 역사·민속·사상과 관련한 책과 자료들이 있었다. 이들 사이사이마다 다시 살펴볼 부분들이 표시돼 있었다. 모두 작품을 쓰는데 필요했던 귀한 도구들. ‘한 줄만 읽어도 잊히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 작가 최명희의 고백이었다.
작가 최명희의 방은 「혼불」이라는 빛나는 문학작품이 탄생한 공간이며, 작품에 투영된 작가의 내면이 일상과 아스라한 거리를 두고 있는 공간이며, 다 맞추지 못한 퍼즐 같은 작품 속 이야기들을 수없이 끼워 맞추는 고단한 노동의 공간이다.

동양화가 고형숙은 책장에 꽂힌 작가의 장서들과 책상 위에 놓인 달력, 펼쳐진 공책, 온갖 메모와 만년필까지 최명희의 서재를 아홉 점의 수묵화에 정적으로 담아냈다. 작가 최명희의 집필공간을 미술작품으로 만나는 시간. “2012년부터 「혼불」을 아껴 읽으면서 미완으로 끝난 이야기가 너무 아쉬웠다.”는 그는 “그래서 각각의 작품들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또한 “실제로 작가의 방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삶과 문학의 성취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 이진화 작가의 「혼불」과 펩아트
‘혼불’과 오얏꽃을 하나로 엮은 작품과 ‘꽃심’에 오얏꽃을 직인처럼 넣은 작품에 더 깊은 애정이 갑니다. 업사이클링(Upcycling)의 의미를 지닌 펩아트가 전주와 최명희와 「혼불」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이진화(공예가)

「혼불」과 연구도서들을 활용한 펩아트(Pap-Art) 작품들은 2020년 봄부터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페이퍼아트(Paper Art)의 줄임말인 펩아트는 헌책이나 폐지 등 다양한 종이를 활용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공예예술이다.

참여 작가는 종이예술가인 종이문화연구소 이진화 대표. 펩아트를 “책에 그림을 그리며 새로운 생명을 입히는 작업”이라고 표현한 이 대표는 책의 낱장들을 접고 자르면서 책의 단면에 ‘꽃심’, ‘전주’, ‘최명희’, ‘혼불’ 등의 단어와 오얏꽃과 기와집 등을 양각과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전주를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 떠올리면서 삶의 쉼표 같은 여유와 애틋함을 더 느끼게 됐다.”는 이 대표는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다시 살피고 해석하면서 자신이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글: 최기우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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