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김영석(시인)의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5-03-29 16:00
조회
2700

출처: 시인 세계2003년 여름 통권 제4호 특집

글쓴이:

김영석(1945년 전북 부안 출생. 1970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썩지 않는 슬픔』『나는 거기에 없었다, 논저에 도의 시학10여 권이 있음.

박정만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이기도 했지만 학교로 따지면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내리 같은 학교를 다닌 3년 후배다. 대학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모습에서 순하디순한 토끼를 연상했다. 갈색의 크고 투명한 눈이 그랬고, 숫된 시골아이가 낯선 곳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어쩐지 쑥스럽고 어색하여 괜히 씩하고 웃는, 그런 웃음을 버릇처럼 곧잘 보이는 양이 또한 그랬다.

죽을 때까지도 그의 그런 숫보기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무슨 문단의 행사에 다녀오거나 글 쓰는 친구들을 만나고 왔을 때, 그는 광대뼈를 흔들면서 사교계를 좀 누볐지.”라고 익살스럽게 과장된 한 마디를 날리면서 예의 그 씩하는 웃음을 짓곤 했다. 내 요량으로는 그 말의 속뜻이 낯짝 두껍게 젠 체하면서 세상 나들이하느라 참 혼났네.’쯤으로 들렸다. 그만큼 그는 세상살이를 아주 낯설어 했고 자신의 삶이 영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져 몹시 주체스러워 했다.

그는 애초부터 이 세상에 잘 적응이 안 되는 피를 가지고 태어난 떠돌이였다. 그래서 그는 아주 생래적으로 죽음을 꿈꾸었던 듯하다. 엄청난 양의 그의 시편들 어디에나 떠돌이의 슬픔과 죽음의 푸르스름한 이내가 감돌고 있다. 그의 시와 삶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는 다음의 초기 시 몇 구절을 보라.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 ―― 「잠자는 돌1, 2

한 마장의 하늘을 떠도는

떠돌이의 피를 가지고

자네, 민들레 꽃씨 같은 얼굴을 하고

어디로 어디로 흘러가는가.

(중략)

나무 그늘 돌 위에

고단하게 쓰러진 저녁 어스름.

쓸어도 쓸어도 쌓이고 쌓이는

그 수정水晶의 푸른 어스름. ―― 「풍장 21, 3

잠자는 돌은 내가 알기로 고등학교 시절의 작품인데 등단 후에 개작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보듯이 그는 벌써 이때부터 죽음을 꿈꾸고 있다. 그는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굳세게 어둠을 짚어가야 하는 어금니는 처음부터 뿌리가 없어 슬픈 귀동냥으로 마을마다 떠다니고 있다.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는 떠돌이의 삶과 그런 삶이 종내 그릴 수밖에 없는 죽음의 슬픔이 풍장 2에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돌 위에 쌓이고 쌓이는 수정의 푸른 어스름은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떠돌이의 가슴에 늘 이내처럼 감돌고 있는 슬픔과 한이리라.

박정만이 지닌 그 토끼 같은 순진성과 죽음을 향한 떠돌이의 피가 때로 묘한 광기와 열정을 만든다는 것을 안 것은 그를 안 지 한참 뒤의 일이다. 기억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때가 박정희의 3선 개헌으로 세상이 좀 어수선할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태일 형과 함께 관철동 어느 구석집에서 우연히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조태일 형은 나와 정만이의 대학 선배니까 오랜만에 나누는 세 선후배간의 허물없는 자리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술기가 꽤 올랐을 때였다. 시에 대한 각자의 평소 생각들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태일 형과 박정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들어 보니 조태일 형은 박정만의 시가 개인적인 서정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적인 충고를 하고 있었고, 정만이는 조태일 형의 시가 시적 감성과 언어감각이 결여된 채 지나치게 목적의식에만 기대고 있다고 맞받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만이의 말투와 태도는 평소의 그것이 아니고 생판 딴 사람 같은 열기와 격정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의 논쟁 아닌 논쟁이 점점 술기와 더불어 거칠어지는 듯싶더니 드디어 정만이의 무슨 말 끝에 조태일 형이 정만이의 뺨을 후려치게 되었다. 그러자 묘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던 정만이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냅다 술잔을 들어 조태일 형의 면상에 패대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형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형은 그 우람한 체격의 치수에 딱 맞게 말없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피를 그저 쓰윽 한 번 훔치고 나서 거푸 소주 몇 잔을 들이켜더니, “나 먼저 나간다. 다음에 보자.”하는 말을 남기고는 나갔다.

두 사람이 그 뒤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여전히 잘 지낸 것은 물론이다. 박정만의 그 토끼같이 순한 심성 속에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의 시에 대한 주장과 고집이 오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광주사태를 겪고 난 5공초 암울하던 때, 정만은 청진동 근방의 모 출판사 편집장 일을 맡고 있었다. 봄볕이 더없이 화사한 어느날 오후. 나는 최명희(, 그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와 그 출판사 부근의 조용한 술집에서 정만이를 불러냈다.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그랬듯이, 글러먹은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몹시 침울하고 다소간 체념적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곧잘 그렇듯이 이야기는 회고조로 변했고 취기가 오르면서는 다시 글러먹은 문학과 글러먹지 않은 문학으로 화제를 바꾸어 목청을 돋우기 시작했다. 희미한 기억들을 모아보면, 박정만은 요약컨대 시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연면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며, 그 표현은 마땅히 우리말의 가락과 뜻이 미묘하게 결합된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우리말에 대한 시적 감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글러먹은 시에 대해 개탄했던 것 같다. 이에 최명희도 동의하면서, 우리의 것을 우리 세대에 복원하고 세련시키지 않으면 우리 문학은 큰 줄기를 하나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다며 대략 전통주의적 입장을 이야기했고, 나는 이들의 말을 다소 예스럽게 표현하여 조선주의 또는 조선혼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동의했던 것 같다.

한참 이야기가 도도할 무렵 열려진 뒷문을 내다보니 보자기만한 뜨락에 새로 돋은 여린 풀잎들 위로 화사한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나는 그런 봄볕의 정경을 보면 슬프다 못해 그만 처참해지고 만다. “처참하구나, 처참해.” 무심코 뱉은 내 말에 정만이 눈치를 챘는지, “, 저 봄볕이 우리들 먹으라고 하늘에서 뿌리는 청산가리요, 청산가리. 저 청산가리 소주에 타서 마시고 우리도 그만 청산가리나 됩시다.” 하고 말을 받았다. 이어 우리는 , 청산가리 한 잔.” “청산가리 곱빼기로 또 한 잔.” 하고 외치면서 거푸 잔을 들었고, 정만이는 드디어 물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며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의 18번을 달뜬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봄날에는 꽃 안개 아름다운 꿈속에서 처음 그대를 만났네……그런데 낌새가 이상하여 옆을 보니 술은 입술에 대는 둥 마는 둥하던 최명희가 흰 무명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누이처럼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니 정만이는 제 식으로 잘 직조된 조선말의 영롱한 시들을 썼고, 최명희도 또한 제 식으로 조선혼을 소설에 수놓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잘 알려진 대로 박정만은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악명 높은 서빙고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나왔다. 그때 모래내에 있던 그의 전셋집을 찾아갔는데 예의 그 어색하게 씩하고 웃는 모습은 이미 예전과는 달리 아주 메마르고 하얗게 풀이 죽어 있었다. 골병 든 삭신의 어혈을 푸느라고 무슨 한약을 막걸리에 달여먹고 있노라 했다. “갇혀 있던 방 철창 너머에 소학교가 있는데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햇살처럼 들려와요. 그때 현실과 꿈이 한가지라는 생각이 듭디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뿌리 없는 떠돌이의 삶은, 그의 시 구절처럼 쓸어도 쓸어도 쌓이는 수정의 푸른 어스름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아주 때를 만나 작파한 듯 잠자는 돌을 향하여 막 굴러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혼, 그리고 어느덧 양식이 된 술.

내리막길을 굴러가는 사람의 절박함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그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는 삽화 하나. 그가 골병 든 심신을 달래면서 술을 마시다가 탈진하면 더러 링거나 영양제 주사를 맞곤 했는데, 그때 주사를 놓아주던 처녀 간호사 염모 씨와 서로 정이 들어 상계동에서 동거 비슷한 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그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 빨리 좀 집으로 오세요. 빨리요, 큰일 났어요.” 쫓기듯 이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필시 그의 말투로 보아 무슨 큰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라 짐작하고, 상황판단과 응변에 있어 누구보다 믿음직한 이윤기를 급히 불러내어 같이 달려갔다. 방안에서는 여러 사람의 거칠고 험악한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들어 보니 염씨의 집안 사람들 몇이 염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는 것이었고, 정만이는 막무가내로 그걸 가로막고 있는 중이었다. 말리고 자실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자식이 셋이나 딸린 중년의 이혼 남자에게 어느 부모가 토달지 않고 아직 처녀인 딸을 고분고분 내놓겠는가. 결국 중과부적으로 염씨는 끌려 나갔고, 우리는 정만이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길이 뛰는 정만이를 우리도 더는 어쩔 수 없어 놓아주었더니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맨발로 댓걸음에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을 맨발로 내달려 가더니 염씨를 잡고 죽어라 매달렸다. 그러나 힘으로 어찌 당하겠는가. 뜯어 말리는 힘에 의해 길 복판에 나둥그라지며 그는 좀 어떻게 해달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사정하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눈빛은 내리막길로 굴러가는 자의 마지막 안간힘, 이승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안타까이 잡아보려는 본능적인 절박한 몸짓,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뒤 그는 염씨와 상계동의 작은 교회에서 열 명도 채 안 되는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기원정사라는 암자가 있는 변두리 야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튼다. 그러나 이미 가속도가 붙은 뿌리 없는 떠돌이의 숙명적인 내리막길을 그 부인 혼자의 힘으로는 처음부터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의 곡기를 끊고 술로 버티며 때때로 미친 듯이 시를 써 갈기던 그는 벌써 저승과 교신을 하고 있었다. 끝내 그 부인도 떠나고 그는 홀로 남아 오로지 시와 술에 한사코 매달렸다.

, 시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밤낮이고 끊임없이 들려요. 어떤 때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죽어라고 그걸 받아 적어야만 해요. 그걸 받아 적지 않으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요.”

이것이 그 무렵 그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시를 끊임없이 써야 했고, 그 시 쓰는 행위는 또한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잉걸불을 부채질하며 사위게 했다. 거기에다 그의 양식은 오직 술밖에 없었다. 그가 죽기 전 한 달도 채 되지 못하는 사이에 써낸 수백 편의 시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가 죽기 바로 전, 봉천동 어느 초라한 개인 병원에 잠시 입원하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시를 들려주던 그 목소리들이 좀 뜸해졌어요. 내가 더 이상 쓸데없어 이제 다들 가버렸나 봐요. 이런 게 평화가 아닌가 싶네요.” 그의 말소리가 거의 바람소리가 다 되었다고 느끼면서, 잠자는 돌 위에 쌓이는 그 수정의 푸른 어스름이 벌써 짙은 어둠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나는 그때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그의 딸로부터 전해 듣고 달려가, 그가 없는 빈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여기저기 노트쪽에 써 갈긴 짤막한 시들을 무슨 유골 조각 줍듯 가려서 훗날 그의 시 전집 속에 함께 담았다. 그때 수습한 마지막 그의 시<span lang="EN-US" style="letter-spacing: 0pt;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mso-font-w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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