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 혼불 완독을 위한 안내서_ 「혼불」 8권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3-05-03 12:40
조회
490
전주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다. 그런 연유로 전주에는 이성계 집안과 관련된 유적지가 곳곳에 있다. 태조 임금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이성계가 운봉 합천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승전을 축하했던 오목대,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 목조 이안사의 출생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는 이목대, 전주 이씨의 시조 묘소인 조경단까지.

전주는 다만 조선의 모태만은 아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이었으며 남북국 시대에는 후백제의 수도였다. 이렇듯 전주는 한반도 역사의 중심축이며 조선 왕조의 뿌리다. 그만큼 전주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고장이다.

「혼불」8권은 특히 후백제 견훤의 역사를 심진학 선생의 강론을 통해 들려준다. 그의 후백제와 견훤 이야기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지금부터 「혼불」8권을 주목해보자.

이야기

「혼불」8권의 주된 스토리는 강호와 춘복, 옹구와 춘복, 옹구와 공배네 이야기다.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매안마을에 온 강호는 춘복, 백단이, 만동이가 투장으로 덕석 말이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매안 양반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거멍굴로 가 그들에게 자신이 인력거를 몰고 병을 팔아 번 돈을 약값에 쓰라고 준다.

한편 강호가 춘복이 손에 쥐여 준 돈을 옹구네가 강탈한다. 공배네가 내놓으라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돈으로 자기 먹을 한약을 짓는다. 자신이 조금만 젊었어도 강실이처럼 춘복의 아이를 가졌을 거라며 지금이라도 약을 먹고 춘복의 아이를 가지려는 욕망에서다.

한편, 옹구네에게 된통 당한 공배네는 분이 치밀어 잠을 이룰 수 없다. 춘복을 낳지도 않았으면서 어미 행세를 한다는 옹구네 말은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었다. 공배네는 춘복을 제 자식처럼 키웠다. 어미, 아비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마을 사람 모두가 춘복이 공배 부부의 아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옹구네가 대뜸 ‘당신이 뭐라고 춘복이 병시중을 드냐며 부모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자 공배네는 무너져 내린다. 게다가 강호가 준 약값을 옹구네가 강탈하자 더한 분노가 치민다. 공배네는 생각 끝에 옹구네 집에 누워있는 강실이를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옹구네가 강실의 보따리도 챙길 거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강실을 데리고 나오기도 전에 옹구네와 마주쳐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결국 강실이를 데려오는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인물 들여다보기: 심진학 선생님

심진학 선생님은 강모의 역사 선생님이다. 강모가 전주고보에 다닐 때 가르쳤던 선생님으로 그는 백제, 후백제의 역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눈을 갖게 하려 애를 쓰는 인물이다.

세상의 삼라만상 모양 가진 것 중에 혹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이름이 없는 것도 있지마는, 역할이 분명한 것치고 이름이 없는 것은 없다. 또 그 이름에는 분명한 뜻이 있다. 정명(正名)으로, 바로 붙은 이름을 바로 쓸 때 사물은 줄기가 바르게 잡히는 법이다. ∥ 「혼불」 8권 73쪽

라는 말로 운을 떼며 전주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주의 지명이 어떻게 변했고 백제와 후백제 멸망에 관한 기록이 왜 잘못된 기록인지 나름의 근거를 대며 밝히려 한다. 그는 백제나 후백제 모두 패자의 역사이기에 승자의 기록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다며 통한의 목소리를 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패자의 내면은 문서로 남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일개 필부로서, 견훤이 왕건과 신검의 싸움을 지켜보던, 환장할 것 같던 지경을 혼자 상상해 보곤 한다. <중략>

어쩌면 견훤은 그 싸움에서 신검이 왕건을 이겨 주기 바랐을는지도 모른다. 비록 자기가 아들의 칼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신검이 왕건을 보란 듯이 무찔러 단칼에 버히고, 자신이 일으켜 세운 후백제 왕업을 자자손손 이어 주기 바랐을는지도 모른다. 엄청난 이율배반이겠지만, 아마도 그것이 어버이요, 제왕의 마음이 아닐까.”

역설과 역사 ∥ 「혼불」 8권 86쪽

심진학 선생은 고려 태조 왕건이 죽으면서 남긴 훈요십조 8항에 주목했다. 공주 차령산맥 이남 땅 아래로는 인재를 선발하지 말라는 8항은 백제와 백제인을 배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왕건은 그걸 노렸는지도 모른다고 심진학 선생은 말한다.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후백제를 천인공노할 반역자의 나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왕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절에 가두고 죽이려 한 아들들, 그런 아들들을 없애달라고 고려 왕에게 머리를 조아린 왕의 이야기는 고려가 후백제를 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주기에 충분했다.

역사의 기록이 심진학 선생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왕건은 재위 기간 백제와 후백제와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많은 장군과 군사를 잃었다. 이는 곧 전주는 원수의 땅이며 수치심의 땅인 것이다. 그는 실제로 고려 창건 때부터 전주를 요주의 하였고 그곳을 경계해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차별은 다행히 조선이 세워지면서 사그라지는 듯했다. 태조의 본향이 전주이기 때문이다. 전주는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고 왕가의 본향으로 조선의 중심인 꽃심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심진학 선생은 통곡한다.

“결과적으로 후백제는 졌다. 진 것은 열패(劣敗)다, 졌으면 없어져도 좋은 것이다, 라고 이긴 고려는 ‘못난’ 후백제를 문질러 버렸다. 날파리 하루살이나 개미 한 마리처럼. 그리고 후백제를 역사 속에 야유거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제군이여, 과연 그러한가. 조선은 망했고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유린하며 짓밟아 국호마저 빼앗았다. 지금 이순간만 본다면, 조선은 지고 일본은 이겼다. 그러니 조선은 못났고 열악하며 깡그리 없어져도 좋은 나라인가?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이 한 나라를 역사 속에서 쓸어내 버려도 좋은가 말이다. 또 일본이 어찌 되었든 이 나라를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으니, 일본은 강하고 아름답고 옳은가? 만일에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라진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서도 반드시 마음을 조아리고 엄숙하게 그 진정을 다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 「혼불」 8권 119쪽

기록은 승자의 일기다. 우리는 그 일기장 사이사이 여백을 깊이 들여다보며 숨겨진 진실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이것이 최명희 작가의 「혼불」 8권을 통해 하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인물 들여다보기: 공배네

거멍굴에 사는 상민 공배네는  공배의 부인이다. 이들은 어린 자식을 병으로 잃고 아이를 갖지 못했다. 자식 없는 설움 중에 만난 아이가 춘복이다. 춘복은 부모를 잃은 천애 고아였다. 공배네는 그런 춘복을 친자식처럼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키웠다. 춘복을 향한 공배 부부의 마음은 친부모보다 더한 사랑이었다.

“그래도 나한테는 우리 춘복이가 있잉게. 머 꼭 지 뱃속으로 나야만 자식이간디? 외나 부모 자식 정리는 낳은 정보돔 키운 정이 더 크다고 않등게비. 옛날 보톰도.”∥ 「혼불」 8권 205쪽

공배네는 모든 어미가 그렇듯 오매불망 춘복의 안위만 걱정한다. 춘복이 자기 같은 상것을 낳을 바에야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공배네는 어떻게든 춘복을 달래서 성혼을 시키려 했다. 하긴 자식이 독신으로 산다는 데 가만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던 중 춘복을 꼬드겨 마누라 행사를 하는 여인이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입담이 거세고 성정이 사나운 옹구네다. 공배네는 옹구네 앞에만 서면 대거리를 못 하고 지레 입을 다문다. 옹구네 입담이 그만큼 거세고 거침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공배네 자체가 말재간이 없는데다 기가 약해 지레 겁먹는 성격이다. 입심 좋고 드센 옹구네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다.

옹구네는 덕석말이를 당하고 누워있는 춘복을 보란 듯이 병시중 든다. 공배네는 그런 옹구네가 마땅치 않다. 수발하려면 어미인 자신이 해야 맞는데 과부가 대놓고 나서대니 기가 막힐밖에.

“성님이 누구시요?”

“머?”

“저 사람한테 누구시냐고.”

공배네는 억장이 무너져 터진다.

그것을 어떻게 말하란 말이냐. 말하지 않아도 춘복이가 알고, 내가 알고, 온 거멍굴이 다 알며, 옹구네 역시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저 사람 낳았소? 성님이 성님 배 아퍼서 낳았냐고요.”

옹구네 낯빛은 차악 가라앉아 찰진 빛을 띄운다. ∥ 「혼불」 8권 223쪽

공배네가 실수한 게 있다면 춘복을 양자로 입적하지 않는 것이다. ‘춘복이 내 아들이다’ 하는 증거가 없으니 옹구네에게 번번이 당할밖에.

자식을 못 나은 게 큰 죄나 되는 것처럼 한평생 죄인처럼 사는 공배네. 이렇듯 양반이든 상민이든 조선 사회는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인간의 도리를 못 한 죄인인 것이다. 그러니 새파란 옹구네가 나이 지긋한 공배네를 몰아세우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과연 부모 자식 관계가 핏줄과 문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입양을 터부시한다. 과거 60년간 해외로 입양된 숫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핏줄을 목숨 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 때문이다. 그런데 「혼불」을 읽다 보면 조선시대는 오히려 입양에 대해 너그러워 보인다. 이기채나 춘복의 경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 양자를 들이거나 버려진 아이를 제 자식처럼 키우는 걸 보면 말이다. 심지어 양자에게 집안의 전 재산을 맡겼으니 인간에 대한 커다란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글쓴이: 김근혜(동화작가)_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동화)로 등단, 『제롬랜드의 비밀』『나는 나야!』『유령이 된 소년』『봉주르 요리교실 실종사전』『다짜고짜 맹탐정』등을 냈다. 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2021년∼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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