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 혼불 완독을 위한 안내서_ 「혼불」 3권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3-03-08 16:49
조회
577
“젊은이의 죽음은 미래를 잃는 것이고 노인의 죽음은 비법을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인간의 죽음은 모든 이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혼불」 3권은 청암부인의 죽음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이 자아내는 이야기와 전통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삶의 방향과 제대로 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 이야기
고희를 넘긴 청암부인은 이제 중노인이 되어 기력이 쇠하다. 아픈 와중에도 청암부인은 오직 손주 강모 걱정뿐이다. 자기 뼈로 일으킨 이 집안을 이을 단 하나의 후손인 강모는 청암부인에게는 목숨과도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강모가 없는 와중에 청암부인은 죽음을 맞이한다.

청암부인은 죽기 전 인월댁과 담소를 나누며 살아 온 삶을 되짚어 본다. 남편 준의를 혼인 나흘 만에 저세상으로 보내고 평생을 청상과부로 산 청암부인은 뼈를 갈아 집안을 일으켰다. 인월댁도 처지는 비슷했다. 결혼하고 홀연 사라진 남편 때문에 과부 아닌 과부로 산 인월댁은 그리움이 한으로 뿌리내린 여인이다. 다행히 청암부인이 내준 베틀에 잔뿌리를 뻗어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있었다. 인월댁과 반대로 청암부인은 그리움이 아닌 희망의 뿌리를 내린 인물이다. 그 뿌리를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해 땅을 사서 재산을 늘렸다. 그러나 그네는 죽기 전 고백한다. 남편 없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논을 사고 또 샀지만, 아무것으로도 그 빈자리는 메울 수가 없었고 대신할 수 없었다고.

죽기 전, 청암부인의 몸에서 혼불이 빠져나온다. 인월댁이 지붕으로 올라가 흰 적삼을 푸덕거리며 혼불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한 번 떠난 혼불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인월댁은 종가의 지붕 위로 훌렁 떠 오르는 푸른 불덩어리를 보았다. 안채 쪽에서 솟아오른 그 불덩어리는 보름달만큼 크고 투명하였다. 그러나 달보다 더 투명하고 시리어 섬뜩하도록 푸른 빛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청암부인의 혼(魂)불이었다.” ∥ 「혼불」 3권 103쪽

운명하기 전에, 저와 더불어 살던 집이라고 할 육신을 가볍게 내버리고 홀연히 떠오르는 혼불은 크기가 종발만 하며, 살 없는 빛으로 별 색같이 맑고 포르스름한데, 다른 사람의 눈에도 선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는 모양이 다른데, 여자의 것은 둥글고 남자의 것은 꼬리가 있다. 그것은 장닭의 꼬리처럼 생겼다 한다. 어쩌면 남자의 불이 좀더 크다고 하던가. ∥ 「혼불」 3권 104쪽

청암부인의 운명을 알 리 없는 강모는 강태와 만주 봉천으로 떠난다. 강태는 비루한 행복에 빌붙어 사는 대신 피가 우는 대로 사는 길을 선택했다. 강모는 사상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오직 매안 이씨 가문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게 목적이었다. 아버지 이기채, 어머니 율촌댁, 부인과 아들 모두 강모에게는 모두 족쇄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한편 이울댁은 이기채가 청암부인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리다. 자신이 낳았지만 단 한 번도 아들이라 불러볼 수 없었던 아들 이기채. 태어나자마자 청암부인에게 양자로 보낸 아들을 보며 자신이 죽어도 저리 슬프게 울어줄지 생각하다 문득 부질없음을 느낀다. 그것은 이울댁 뿐만이 아니었다. 거멍굴, 고리배미 사람들 모두 청암부인의 죽음에 마음이 뒤숭숭하다.
  • 인물 들여다보기: 춘복
「혼불」 3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춘복. 조실부모한 춘복은 신분이 미천해 남의 허드렛일을 하며 사는 거멍굴의 사내다. 양반들을 향한 이유 없는 반감과 분노는 결국 자신과 닮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어진다. 그는 천한 신분을 벗어나지 못할 바에야 결혼은 해서 무엇하고 자식은 낳아서 무엇 하나 싶다. 그러던 중 과부 옹구네로부터 강실이가 강모로부터 겁탈당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 순간, 춘복은 감히 쳐다보지 못했던 강실을 상대로 신분 상승의 꿈을 키운다. 바로 양반가 여자인 강실이를 아내라 맞으려는 꿈이다. 고리배미에 사는 쇠여울네가 자식이 굶어 죽자 모든 게 입도선매로 땅을 가져가고 돈을 주지 않은 이기채의 탓으로 여겨 집으로 달려가 패악을 부린다. 이때 쇠여울네의 뒤통수를 춘복이 내려친다.

쇠여울네. 인자 두고 보시오. 죽지 말고이 살아서 두 눈 딱 뜨고, 꼭 보시오. 강실이가 이놈 춘복이란 놈 자식 새끼를 낳고 마는 것을 뵈야딜릴 거잉게, 그날끄장은 죽지 마시오. 그거이 머 멫 천 년이나 남은 것도 아닝게, 쇠여울네, 어디로 가서 살든지 소식 끊지 말고 그날을 지달리고 있으시오. 쇠여울네가 울고 내가 울고, 거멍굴에 엎어진 인생들이 울고 울던 설움을 내가 모질게 갚어 줄 거잉게, 오늘 내가 내리친 장작에 어깨 찢어진 거, 너무 야속타 말으시오, 쇠여울네. 미안허요. ∥ 「혼불」 3권 37쪽


  • 인물 들여다보기: 옹구네
거멍굴에서 입이 가장 가볍고 거칠기로 소문난 과부다. 손이 야무져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하지만, 이런저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모사꾼이다. 총각 춘복을 꼬드겨 자기 남자로 만들려 하지만 춘복은 온전히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옹구네는 춘복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급기야 강실이를 이용해 춘복을 꽉 붙잡아 두려는 계략을 짠다.

안 듣는 디서는 나랏님 숭도 본다는디 지께잇 거이 무신 충신 났다고……허이고 차암, 즈그 씨엄씨등갑다. 내가 머 그란 말 했간디? 밥 한 숟구락이라도 얻어 먹으랑게, 속도 없는 겁맹이로 주뎅이 다물고 살제마는 그런다고 내가 머 없는 소리 지어 낸 것은 아닝게. 그러고 이날끄장 차알찰 시퍼렇게 물이 넘치든 청호 저수지가 멋 할라고 작년 올에사 말고 그렇게 거북이 등짝맹이로 짝짝 갈러졌겄어? ∥ 「혼불」 3권 22쪽


  • 인물 들여다보기: 청암부인
소설의 가장 핵심 인물이면서 작가의 작가관을 엿볼 수 있는 인물이다. 18살에 청상과부가 된 청암부인은 넓은 이마와 두드러진 양 광대뼈, 두툼하고 긴 코에 풍요로운 턱을 가진 마치 제세의 호걸 같은 기상을 뿜는 이미지다. 음성도 우렁우렁 세상을 호령하는 듯 우렁차고 거침이 없다. 떡 벌어진 어깨에 키가 크다. 커다란 덩치는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청암부인은 남편 준의가 죽고 곧바로 흰 가마를 타고 와 매안 이씨 가문으로 들어온다. 다 쓰러져 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림을 늘린다. 덕분에 집안은 다시 기둥이 서고 남원 일대에서 크게 칭송받게 된다. 돈 모으는 재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집안의 종부로 법도를 목숨과도 같이 여긴다. 조상을 잘 모셔야 집안이 잘된다고 믿는 청암부인은 타성바지들의 조상 기일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섬세하다. 집안에 새사람이 들어와 절을 할 때도 옷매무새, 절하는 자세 하나하나 따져가며 범절을 지키기를 강조했다.

청암부인은 무엇보다 종부의 역할을 제일로 여겼다. 종부는 집안의 어른으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집안의 모든 살림을 맡아야 하기에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효원에게 종부의 역할을 말하며 자신을 대신해 집안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 사상
청암부인의 죽음으로 3권에서는 장례문화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죽어가는 자 머리맡에 놓는 혼백 매듭부터 시작해 햇솜을 인중에 놓고, 사잣밥을 차리고, 염을 하고, 상여가 장지까지 가는 장면 모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청암부인이 죽자 인월댁이 지붕 위로 올라가 혼을 부르는 장면은 3권에서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초혼이라고 하는데 혼불이 빠져간 후 가장 친했던 일가친척이 지붕으로 올라가 적삼을 흔들며 혼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윽고 그네는 청암부인의 적삼을 활짝 펼쳐 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적삼의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 허리를 잡아 허공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천천히 휘둘렀다.(중략)

“청아암 부이인 보오옥.”

인월댁이 목메이게 고복하여 혼을 부르는 소리는 바람이 실어가 먼 곳으로 아득하게 흩어졌다.

돌아오라, 혼백이여. ∥ 「혼불」 3권 123쪽

분주한 상갓집 풍경, 상주들의 상복 차림새나 상여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 선소리꾼의 애절한 목소리, 두 명의 곡비가 억지로 짜내는 울음소리, 가족들의 절절한 흐느낌 모두, 문자가 영상과 소리로 치환되는 기적을 맛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장례를 통해 다시 기억되고 기록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세심한 과정을 거쳐 장례를 치르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정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한 사람의 생을 제대로 정리하고 기억하려는 조상들의 경견한 태도를 3권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글쓴이: 김근혜(동화작가)_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동화)로 등단, 『제롬랜드의 비밀』『나는 나야!』『유령이 된 소년』『봉주르 요리교실 실종사전』『다짜고짜 맹탐정』등을 냈다. 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2021년∼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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