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 혼불 완독을 위한 안내서_ 「혼불」 1권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3-03-08 16:37
조회
1011
  • 공포의 자주색
스릴러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이 문장은 천재 문사로 이름을 날린 최명희 작가의 여고 시절 별명이다. 자주색의 전주 기전여고 교복을 입고 나타나 백일장의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기 때문이다.

‘공포의 자주색’ 최명희는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기전여고와 서울 보성여고에서 국어 교사를 하다 1980년 동아일보의 60주년 기념 2천만 원 장편 소설 「혼불」이 당선되면서 전업 작가로 전향한다.

「혼불」을 집필하는 동안 최명희 작가의 별명은 ‘성보암 최보살’이었다.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창작에만 매진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별명이 증명하듯 작가는 만 17년이라는 긴 시간을 「혼불」 집필에 쏟아부었다.
  • 「혼불」은 어떤 소설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번 스토리텔링은 쉽게 읽히지 않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꼭 읽어야 할 고전 「혼불」에 관한 읽기 안내서이다.

먼저 스토리를 살펴보자. 혼불은 남원 매안 마을에서 벌어지는 매안 이씨 양반가와 거멍굴 사람들 간의 이야기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매안 이씨 집안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은 매안 이씨 가문을 일으킨 여장부 청암부인이다. 그리고 양자 이기채. 그리고 그의 아들 강모와 강모의 부인 효원, 강모가 사모하는 사촌 여동생 강실이다. 거멍굴의 주요 인물은 새 세상을 꿈꾸는 춘복과 억세고 입심 좋은 여인 옹구네다.

1권은 효원이 사는 대실마을의 풍경 묘사로 시작된다.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 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蕭蕭)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혼불」 1권 7쪽

그다지 쾌청하지 않은 날씨에 대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까지. 이제 곧 혼례가 있을 대실 마을 분위기는 퍽 암울하다. 댓잎이 바람에 사그락 사그락 소리를 내다가도 우우우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를 내는 스산한 분위기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따라가다 보면 매안 이씨 가문의 장손인 강모의 혼례가 펼쳐진다. 강모는 솜털이 부숭숭한 어리디 어린 외모의 소유자다. 매안 이씨 가문의 장손이기도 한 강모는 대실 마을 효원과 혼례를 올린다.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그네의 모습에서는, 열여덟 살 새 신부의 수줍음과 다감한 풋내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위엄이 번져 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네의 골격 때문인지도 몰랐다.∥ 「혼불」 1권 15쪽

사모(紗帽)를 쓰고, 자색(紫色) 단령(團領)을 입은 신랑은 소년이었다. 몸가짐은 의젓하였지만 자그마한 체구였고, 얼굴빛은 발그레 분홍물이 돌아, 귀밑에서 볼을 타고 턱을 돌아 목으로 흘러내리는 여린 선에 보송보송 복숭아털이 그대로 느껴진다.∥ 「혼불」 1권 16쪽

강모는 자신보다 큰 골격의 신부 효원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혀온다. 거기다 혼례식 도중 매듭을 묶지 않은 청실홍실 실타래가 꼬이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이들의 관계가 녹록지 않음을 예견한다.

이런 강모를 누구보다 애지중지하는 인물이 바로 매안 이씨 가문을 일으킨 청암부인이다. 청암부인은 강모의 친할머니로 신랑 준의가 혼인하고 삼 일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혼자가 되었다. 청암부인은 남편도 없는 이씨 가문으로 시집와 가세가 기운 집안을 혼자 힘으로 일으킨 철의 여인이다. 그는 자신이 이룬 부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기를 실천한다. 그 증거가 청암 저수지다. 그의 양자인 이기채가 저수지 축조를 반대하고 나서자 청암부인은 진정한 어른으로 사는 법에 대해 말한다.

사람은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자기 가솔을 굶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열 섬지기 짓는 사람은 이웃에 배 곯는 자 있으면 거두어 먹여야 하느니라. <중략> 그래서 장자는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지. 그렇다면 그런 장자로만 이어져 내려온 종가란 문중의 장자인 셈이다. 어른인 게지. 어른 노릇처럼 어려운 게 어디 있겠느냐? 제대로 할라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어른 노릇이니라.” ∥ 「혼불」 1권 147쪽-148쪽

그렇게 지켜온 가문이 창씨개명으로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청암부인은 병을 앓는다. 성씨를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니 병이 안 나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그러니 강모가 혼인해 대를 잇는 것은 청암부인에게는 필생의 과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모는 청암부인의 바람과 달린 효원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다. 사실 강모에게는 오래전부터 연정을 품은 이가 있다. 그건 바로 사촌 강실이다. 거기다 성품이 유약하고 마음이 여린 탓에 장손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감을 버거워한다. 도망 치고 싶어 음악을 배운다는 핑계로 일본으로 유학 가기를 희망하지만 대추씨 같은 성품의 이기채가 허락할리 없다.
  •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마음
강모와 효원의 혼례 장면이 마치 백과사전을 옮겨 온 듯 자세하다.

“부서언재애배애(婦先再排).”

혼례 의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忽記)를 두 손으로 받들어 정중하게 펼쳐 들고 예를 진행하는 허근(許槿)의 목소리는 막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허근은 신부의 종조부이다.

신부가 먼저 두 번 절 하라는 말이 꼬리를 끌며 마당에 울리자, 신부의 양쪽에 서 있던 수모(手母)가 신부를 부축한다.

신부는 팔을 높이 올려 한삼으로 얼굴을 가리운다.

다홍 비단 바탕에 굽이치는 물결이 노닐고, 바위가 우뚝하며, 그 바위 틈에서 갸웃 고개를 내민 불로초, 그리고 그 위를 어미 봉(鳳)과 새끼 봉들이 어우러져 나는데, 연꽃 ‧ 모란꽃이 혹은 수줍게 혹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는 신부의 활옷은, 그 소맷부리가 청 ‧ 홍 ‧ 황으로 끝동이 달려 있어서 보는 이를 휘황하게 하였다.∥ 「혼불」 1권 14쪽

혼례음식부터 신부가 입는 활옷, 혼례식 순서까지 전통 혼례 의례가 소설에 면면이 적혀 있다. 이것 외에도 1권에는 두레와 품앗이, 농악을 자세히 풀어 놓았다. 덕분에 잊히고 기억 속에 사라진 우리 전통문화를 뒤돌아보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그러니 절대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 혼례 장면을 떠올려 보고 재재쟁쟁 울리는 꽹과리를 치는 광대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며 읽자. 그럼 「혼불」 읽는 재미가 한층 배가될 것이다.
  • 명문장 찾아보기
명문장 찾기를 하며 읽어 보는 건 어떨까? 이땐 수첩과 필기구를 옆에 꼭 두고 읽어야 한다. 「혼불」을 읽다 보면 적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명문장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혼불」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마다 깊은 뜻을 품고 있다. 그건 마치 어미가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는 것처럼 숭고하고 아름답다. 특히 1권에 나오는 청암부인의 말은 명언처럼 다가간다. 청암부인이 들려주는 어른 된 도리, 있는 자의 도리를 되새기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가를 깨닫는 시간을 갖자.

기다리는 것도 일이니라. 일이란 꼭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지. 모든 일의 근원이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인즉, 네가 중심을 가지고 때를 고요히 기다리자면 마음이 고여서 행실로 넘치게 마련 아니냐. 이런 일이 조급히 군다고 되는 일이겠는가. 반개한 꽃봉오리 억지로 피우려고 화덕을 들이대랴, 손으로 벌리랴. 순리가 있는 것을. 허나, 나는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시절은 흉흉하여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지라, 어린 너한테 과중한 짐을 부려 버리고자 이렇게 자꾸 다짐을 하는 것이니라.∥ 「혼불」 1권 262쪽

※ 글쓴이: 김근혜(동화작가)_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동화)로 등단, 『제롬랜드의 비밀』『나는 나야!』『유령이 된 소년』『봉주르 요리교실 실종사전』『다짜고짜 맹탐정』등을 냈다. 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2021년∼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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