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살소살

삶을닮다(오늘의필록)

미당 시 문학관 / 늙은 시인의 변명

작성자
Oz
작성일
2007-11-18 12:26
조회
2478

늙은 시인의 변명

선운사에서 차로 10분 거리란다. 그 말만 믿고 걸었다. 깜박했다. 어느 정도 속도로 10분 거리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결국 10분이 한 시간이 됐다. 한 시간 동안 만난 벗은 코스모스, 낚시꾼, 사마귀, 어느 동네나 있는 친근한 바보 형(무턱대고 달려왔을 때는 정말 무서웠다.)까지. 해가 뉘엿거리며 붉은 빛 노을을 뿜어내고 있을 무렵 간신히 시간에 맞춰 시문학관에 도착했다.

폐교를 이용해서 지은 건물이다. 건축가로 유명한 김원 선생이 지은 건물이라 한다. 문학관에 비해 너무 넓은 공간이 무턱대고 있는 것이 횅하다. 커다란 자전거가 무색할 정도로 넓다.

걸어서 왔다고 하니 놀라는 표정이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곳이라 웬만해서 걸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보여 그냥 묻어두기로 한다.

시문학관은 폐교라는 특성을 살렸는데 폐교를 그대로 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추억을 위해서 일 것이다. 폐교라지만 마을 사람들이 다녔을 학교를 부수고 문학관을 짓는다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화살표로 관람 동선을 그려주고 있다. 유품과 미당의 훈장과 상이 보인다. 그냥 그렇다.

안쪽에 미당의 친일시가 눈에 보인다. 문학관 내부에서 제일 먼저 접한 미당의 시가 친일 시다. 안 좋은 것은 감추기 마련인데 놀랐다. 시인이 친일과 독재정권을 찬양한 시를 썼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문학관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독특한 느낌이다. 좋지만 씁쓸하다. 한국 10대 시인 중 한 명이고 살아생전 노벨문학상 후보로 항상 올라있던 시인 서정주.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천부적이었을지는 몰라도 그의 인생행로는 우매함의 연속이었던 촌부에 불과해 보인다.

특히 친일의 변명인 「중천순일파」나 “일본이 그렇게 쉽게 망할 줄 몰랐다.” 는 발언이 과연 친일의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죽는 순간까지도 친일에 대해 반성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시를 아무리 잘 쓴 다해도 인간적으로 좋아지지가 않는다.

“유명한 건축가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전망대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래도 전망대라고 하니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마다 작은 전시실이 나온다. 계단 벽면에는 처음 보는 산과 이름이 보인다. 시인, 말년에 생긴 취미가 산 이름을 외우는 것이라 한다. 왜 산 이름을 외우냐고 물었더니, 산 이름을 외우고 있으면 그 산의 산신을 만나는 것 같다고 했단다.

계단을 오르며 그에 대해 알면서 더 화가 난다. 친일이나 권력에 빌붙지 않았다면 서정주라는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을 시인. 하지만 친일과 군사정권의 찬양은 그의 시를, 그의 말을 온통 가식적으로 만든다.

전망대에 다 올랐을 무렵 산으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 붉은 노을만이 빛을 뿌린다. 멋지다. 라는 말을 연거푸 뱉는다. 고작 한 줄기만 보고 실망했던 것이 건축가에게 미안해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건축가도 이 노을을 보고 전망대를 새워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자신이 본 노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어쩌면 늙은 시인도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말한 변명보다 더 그럴듯한 변명이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걷지 못해 택시를 불러 터미널로 향한다.

변명 하나, 버스시간이 촉박했다. 둘, 다리가 너무 아팠다. 셋, 귀찮았다.

/ 조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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