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남원 서도역…기적소리 끊어진 驛…안타까운 이별이 서성인다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2-05 06:44
조회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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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도역은 폐역된 후 지역주민과 사회단체의 건의를 남원시가 받아들여 영상촬영장으로 거듭났다. 철길 오른쪽 관사 건물이 영화 '동주'의 촬영지다.
허허벌판에 기차 레일이 깔린 것은 1931년, 전라선(당시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되었을 때다. 역사는 그 이듬해인 1932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서도역은 2002년 고속철 개통에 따라 전라선을 옮기면서 폐역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 지역주민과 사회단체의 보존 건의를 남원시가 받아들이면서 영상촬영장으로 거듭났다. 영화 '동주'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근래에 칠을 한 듯한 하얀 건물이 역사 옆으로 나란하다. 서도역의 부대시설로 화장실, 직원휴게소, 창고 등이 있던 곳이다. 역사 앞마당에는 이끼를 두른 거대한 둥치의 벚나무가 곱게 서 있다. 역사 내부는 텅 비었고 깨끗하다. 이리(지금의 익산)·여수 방면으로 나뉜 열차 시간표, 매표 창구, 긴 벤치, 창으로 깊이 파고든 햇살, 창 너머로 녹슨 철로와 수동 선로 변환기가 사진처럼 걸려 있다. 개찰구를 빠져 나가면 철로는 먼 곳으로 사라진다.

북쪽으로 향하는 철길 가에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짧은 터널을 만든다. 그 옆으로 두 채의 집이 있다. 역장 관사와 역무원 관사다. 역장 관사는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하숙집으로 쓰였다. 남쪽의 철길 가에는 오래돼 보이는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전라선 완공 당시 식재된 것이라 한다. 역사 앞마당의 벚나무도 같은 시기가 아닐까 싶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이 철길 사이에 앉아 마음으로 읊조렸다. '오지마. 오지마라.' 그날 고애신은 왔고, 이제 기찻길은 익산으로도 여수로도 가지 않는다. 그것은 뻗다 만다. 저기에서 또 저기까지. 여전히 레일은 평행하다. 여전히 수많은 침목들이 그들의 간격을 강제한다. 그들은 그 간격을 유지시키고 또 이어주기도 한다. 여전히. 그 책무, 참 얄궂다.

기차 소리가 가까이 들린다. 황량한 철길을 몇 번이나 건너 지르는 사이 몇 번이나 기차 소리가 들린다. 옛날 서도역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이웃한 순창 사람들도 서도역으로 와 열차를 타곤 했단다. 역전 거리에는 가게가 즐비했고 두 개나 있던 이발소는 명절 때가 되면 한나절씩 기다려야 할 만큼 벅적거렸다고 한다.

휑한 역전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자그마한 서도교회 옆으로 관사 건물의 이면이 나란하다. 그들 맞은편으로 난 언덕진 길 위에 새로운 서도역이 있다. 새로운 서도역은 지어진지 2년 만인 2004년에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고, 2008년 7월1일 역무원이 철수했다.

◆서도리와 '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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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도역에는 수동 선로 변환기, 완목신호기 등의 철도 관련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도역은 드라마와 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이미 훨씬 전에 최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지로 알려져 있던 곳이다. '혼불'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매안이씨 양반집안의 3대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작품은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몰락하는 양반과 신분 상승을 꿈꾸는 상인의 갈등을 축으로 당대 남원 반가의 풍속과 언어가 생생하고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원고는 전체 4만 6천장. 그 배경이 서도리의 자연마을인 노봉마을이며 원고의 첫 장면이 서도역에서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서도역은 '정거장' 혹은 '매안역(梅岸驛)'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주인공 허효원이 열아홉에 완행열차를 타고 시집을 오는 장면에서 이 역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서도역에서 노봉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수풀 우거진 낮은 언덕이 팔을 길게 뻗어 감춰 놓았다. 그 언덕 아래를 돌아 들어가면 노적봉 기슭에 자리한 노봉마을이 있다. 노봉마을은 삭령최씨가 500년간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작가 최명희의 고향이다. 사람들은 노봉마을을 '혼불 마을'이라 부른다. 소설에서 노봉마을은 매안마을로 나온다. 마을 안쪽에는 종부 3대인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이 살던 곳으로 묘사된 종택이 있다.

마을을 비스듬히 굽어보는 한 뼘 높은 자리에는 '혼불문학관'이 있다. 2004년 10월에 문을 연 문학관은 유품 전시실과 집필실인 작가의 방, 주제 전시실 등 최명희의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취들로 채워져 있다. 문학관 옆에는 청호저수지가 있다. 소설에서 청암 부인이 가뭄에 대비해 팠다고 묘사한 못이다. 실제 청호저수지는 최명희의 집안에서 100년 전에 만든 것이라 한다. 둑길에 짧은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줄지은 솟대들이 동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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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은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 동안 쓰여졌다. 긴 시간 집필에만 매달렸던 최명희는 결국 난소암으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최명희가 칩거해 있던 서울 청담동 성보아파트를 '성보암'이라 불렀다. 성보암에서 최명희는 도를 닦는 스님이었다. 마지막 탈고 4개월 동안 그녀는 자리에 눕지도 않았다고 한다. 1998년 12월11일 결국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쉰한 살이었다. 쓰는 길, 서도(書道). 그 이름 참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말했다. '제 고향 땅의 모국어에 의지하여 문장 하나를 세우고, 그 문장 하나에 의지하여 한 세계를 세워보려고 합니다. 한없이 고단한 길이겠지만, 이 길의 끝에 이르면 저는, 저의 삶과, 저 자신이, 서로 깊은 이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혼불'은 10권으로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그녀는 더 쓰겠다고 했다고 한다. 몌별(袂別)인가, 소매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별. 그 고단한 길이, 그 안타까운 이별이, 서도에 서성인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남원IC에서 내려 우회전한 뒤 백공산사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해 계속 직진한다. 월평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직진하면 된다. 역전 길 북쪽 끝에서 좌회전하면 혼불문학관 이정표가 있다. 서촌마을 지나 노봉마을 끝에 문학관이 자리한다. 문학관 개관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동절기인 11월부터 2월까지), 그 외에는 6시까지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매년 1월1일이다. 입장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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