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내 마음의 산책로, 이 가을의 혼불 공원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2-12-16 14:07
조회
2198
출처: http://www.jj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8123
내 마음의 산책로, 이 가을의 혼불 공원
양정복 완주교육지원청 장학사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이 잠들어 있는 혼불문학공원. 여린 잎들이 연두로 올라오는 계절인 초봄의 싱그러움도 좋지만 내 마음을 더 사로잡는 풍광은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10월부터 황홀하게 불타오르는 11월 중순까지, 그리고 그 잎들이 낙화해 잔디에 쌓여 햇살을 바라보며 말라가는 초겨울까지다.

단풍이 시작되는 혼불문학공원을 찾으면 잎들이 조르르 서서 차례차례 물들어 가는 키 큰 단풍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풍성해진다. 잎이 질 때 단풍나무 낙엽을 밟으며 산책을 하다 보면 온몸으로 계절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단풍잎이 오색 별사탕처럼 쏟아져 내린 숲속을 걷다 보면 입안에서 별사탕이 깨질 때처럼 바사삭바사삭 소리가 나곤 한다. 하늘을 닮은 둥근 무덤이 자리한 건지산 끝자락, 이 자리는 작가가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기 때문에 자손 발복을 고려하지 않은 풍수터라 한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찾아와 작가를 기리게 되는 자리라 한다. 그리움 품고 떠올리는 장소 그래서인지 나 또한 늘 가보고 싶어서 마음에 그리움을 품고 떠올리는 장소다. 어느 풍수학 강사는 '최명희 선생의 무덤 터는 멀리서 보면 마치 초롱불 같다.'고 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최명희 작가의 묘소에 가면 내 마음도 깜빡깜빡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을 오고 간다. 몇 발자욱 나오면 현실이고 숲길로 몇 발자욱 들어가면 딴 세상에 자리한 것처럼...혼불문학공원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또 다른 것으로는 가장자리에 동글동글 놓여서 글을 품고 있는 다양한 크기의 오석이다.

후배 작가들이 최명희 작가 생전의 어록과 ‘혼불’에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글귀를 가려 뽑아서 오석에 새겨놓았다. 떡갈나무와 단풍나무 그늘을 오가며 오석에 새겨진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자주 가서 바라보고 읽는 글이지만 그날그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마음에 닿는 글이 매번 다르다.

오늘 내 마음은 다음 글에 반응한다. '머무는 곳을 소중하게 알아야 한다. 고을이건 사람이건 바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만난 이 순간의 이 사람이 내 생애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인즉' <소설 '혼불' 중에서>

이 글은 일상에 지쳐 있을 때, 사람에 부대껴 생채기가 난다고 느끼는 순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준다. ‘그래,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사람이 내게는 제일 소중한 시간이고 사람이다. 지치지 말고 부대끼지도 말고 예쁜 사람이라고 고마운 일상이라고 행복하게 손잡고 걸어가야 한다.

이 순간, 이 사람이 내 생애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인즉, 머무는 곳을 소중하게 알아야 한다.’ 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게 해준다. ‘사랑에 빠지면 곰보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점만 보인다는 말이다. 사랑하게 될 때는 상대의 좋은 점만 보이고 장점을 찾아 칭찬해주게 된다. 뭔가 부족한 점은 얼른 가서 도와주고 감싸주다 보니 도와줄 기회를 주는 것도 보조개처럼 예뻐 보이게 된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은 나쁜 점, 부족한 점만 보이게 된다. 오석에 새긴 글귀 깊은 여운 내가 일상이나 사람에 지치게 된 이유가 혹시나 속담과는 반대로 ‘보조개를 곰보로 보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내 곰보는 보조개로 봐 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오석에 새겨진 글의 깊고 무거운 의미가 마치 싸아한 저녁공기를 가르며 멀리 퍼져나가는 범종소리처럼 길게 울리면서 내 마음에 여운을 안긴다.

‘혼불’은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로 시작하여 '그 온몸에 눈물이 차오른다.'로 끝난다. 그 사이를 수놓은 아름다운 언어들, 우리말의 맛을 너무나도 잘 살려준 작품을 읽다보면 느릿느릿하면서도 때로는 찰지게 사나운 전북사투리가 구수하게 다가온다.

그 말맛에 젖어 ‘혼불’을 다시 잡게 되곤 했는데, 올해는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야지 하면서도 읽지 못하고 벌써 연말을 맞았다. ‘혼불’을 몇 권이라도 다시 한 번 읽으리라 결심하면서, 오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소중하게 살아갈 힘을 혼불문학공원, 내 마음의 산책로에서 얻고 돌아왔다.
전체 13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56
시와 소설로 읽는 전주한옥마을(1)
최명희문학관 | 2015.04.29 | 추천 0 | 조회 2748
최명희문학관 2015.04.29 0 2748
55
김영석(시인)의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최명희문학관 | 2015.03.29 | 추천 0 | 조회 2694
최명희문학관 2015.03.29 0 2694
54
우리의 말과 글을 아끼자(전북대신문 사설)
최명희문학관 | 2014.12.24 | 추천 0 | 조회 2130
최명희문학관 2014.12.24 0 2130
53
역사의 파편 속에 새로운 스토리를 더했습니다
최명희문학관 | 2014.12.24 | 추천 0 | 조회 2236
최명희문학관 2014.12.24 0 2236
52
불교신문_ 불교와 전래…이젠 ‘인류보편 문화’
최명희문학관 | 2014.07.01 | 추천 0 | 조회 2236
최명희문학관 2014.07.01 0 2236
51
최명희의 혼불 문학공원을 다녀오다
최명희문학관 | 2014.03.21 | 추천 0 | 조회 2376
최명희문학관 2014.03.21 0 2376
50
전주 기전여고·기전중 - 일제 신사참배 저항한 기독교 전통 학교
최명희문학관 | 2013.12.12 | 추천 0 | 조회 3621
최명희문학관 2013.12.12 0 3621
49
[김완주]제2회 혼불문학상 시상식 축사
최명희문학관 | 2013.02.02 | 추천 0 | 조회 2502
최명희문학관 2013.02.02 0 2502
48
[매경춘추] 양반정신과 첨단산업
최명희문학관 | 2013.02.02 | 추천 0 | 조회 1970
최명희문학관 2013.02.02 0 1970
47
내 마음의 산책로, 이 가을의 혼불 공원
최명희문학관 | 2012.12.16 | 추천 0 | 조회 2198
최명희문학관 2012.12.16 0 2198
메뉴
error: 콘텐츠가 보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