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예스 TV광주 - 염정금 기자의 문학관 르포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9-03-10 10:44
조회
2587

전주 '혼불'의 최명희 문학관

▲ 최명희 선생
방학 끝 무렵, 아들이 초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겨울방학 체험을 어디에서 하나 궁리하던 중 무언가 뜻깊은 것을 심어주고자 우리 전통문화와 정신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전주한옥마을을 찾았다.

한옥마을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 풍남동 일대 7만 6,320평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성곽을 헐고 도로를 뚫은 뒤 일본상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현재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은 여러 채의 한옥 모습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정겨운 골목들이 남아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 옛날로 돌아간 듯한 곳이다.

한옥마을 체험 숙박장소인 동락원에서의 고즈넉한 밤을 지내고 이른 아침 전통공예 전시관에 들러 여러 공에품을 구경한 뒤 찾아간 혼불의 최명희 문학관!

한옥마을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어 소문을 듣고 찾아오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울 정도로 아담한 한옥이다.

2001년부터 국비 16억여원을 들여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80여 평 규모의 '최명희문학관'을 건립하여 2006년 4월 25일 개관한 이 문학관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깔끔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우리 가족 외에 찾아온 이가 없어 고즈넉하다.

▲ 최명희 문학관 전경

전주 최명희문학관은 꽃심을 지닌 땅의 시민 밀착형 문학관이란 모토답게 누구든지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으며 엽서쓰기, 필체 따라 쓰기 등 자유로운 참여활동이 가능한 곳으로 작품보다 작가 최명희를 중심으로 구성된 문학관이다. 혼불은 혼례의식이나, 청암부인의 장례식 장면, 또 연날리기 장면, 복식에 대한 묘사, 윷점이야기, 조왕신의 습속 등 우리문화사에도 길이 남을 작품이다.

작가는 이 혼불을 쓰기 위해 중국을 여행하기도 하고, 노비이름 하나를 짓기 위해 전국에 있는 노비문서를 찾기도 했다.

이런 최명희 작가의 흔적을 찾는 이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문학관이다.

작은 마당을 거쳐 문학관 실내인 독락재로 들어서면 최명희의 삶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1981년 동아일보 장편 공모전 당선작인 <혼불(제1부)>이 발간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다소곳하게 놓여 있고, 본인의 저작에 서명한 깔끔한 글귀와 생전에 쓰던 만년필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혼불을 쓰게 하는가>

유리 너머로 도드라져 보이는 글귀를 보며 원고지에 판각하듯 꼼꼼하게 혼불을 써 내려가던 최명희 작가를 떠올려본다.

최명희는 혼불을 쓰게 된 이유를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라 말하고 있다.

이 우주 공간에 구체적인 존재로서 생물학적인 생명체인 '나'를 있게 하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하여 그 윗대들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으며, 누구와 어떤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서 '끊임없이 혼불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작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혼불은 역사적 사건추이를 더듬어가는 여느 대하소설과 달리, 1930년대 초의 전라북도 남원을 배경으로 몰락해가는 종가의 종부 3대가 겪는 삶의 역정을 한국인의 세시풍속, 무속신앙, 관혼상제, 관제, 직제, 신분제도, 의상, 가구, 침선, 음식, 풍수 등 당대의 습속과 풍물을 눈에 잡힐 듯 꼼꼼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 편지들을 비롯해 생전의 인터뷰, 문학 강연 등에서 추려낸 말과 글, 문학관 벽면을 따라 빼곡하게 전시해 놓은 육필 원고의 사본들과 함께 최명희의 빛바랜 추억 하나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최명희가 전주 기전여고 3학년 재학시절(1965), 전국 남녀문예콩쿠르에서 장원으로 당선된 작품 <우체부 아저씨>다.

문학 소녀였던 여고시절 최명희를 떠올리며 우체부를 탐독한 후 문학관 한 켠에서 방영되는 최명희 일대기를 주제로 하는 타큐멘터리 영상물을 접한다.

'이 영상물은 최명희 선생의 친동생인 최은영씨(타큐멘터리 작가)가 직접 글을 쓰고 구성해 제작한 것'으로 최 작가의 문학 철학과 최 작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론을 담은 영상을 모니터를 통해 전하고 있다.

사각 유리 상자에 들앉은 "혼불"의 1만 2,000여장의 육필원고!

판각하듯 원고지에 새겨 넣는 최명희 작가의 17년간 고통스러운 저작과정이 낱장마다 실려 전해온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가슴 밑둥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불길. 그 불길에 휩싸여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을 그리며 근원의 그리움으로 밤을 새워 하얀 원고지에 판각하듯 혼불을 새겼을 그녀의 고통이 전해와 가슴이 시리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최명희는 그렇게 혼불을 1만 2,000여장의 원고지에 비문처럼 새겨 넣은 것이다."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나는 때때로 엎드려 울었다."

암에 걸려 몇 차례나 혼절을 거듭하면서도 비문을 새기듯 작품을 집필하고 수정, 보완한 것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는 대하 소설 혼불 5부 10권을 세상에 남겨놓고 떠났다.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갑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뒤이어 찾은 지하공간에 위치한 비시동락지실은 문학강연과 기획전시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문학 강연과 기획전시장으로 이용되는 비시동락지실

비시동락지실은 때를 정하지 않고 노소동락 교학상전의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문화, 문학이 함께 하는 장소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이다.

최명희문학관 월례문학세미나, 장성수관장과 행복한 소설읽기, 문학관행사, 상설체험행사 등 각종 행사나 세미나가 개최되는 곳이고 박예분 선생님의 글쓰기교실이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날은 행사가 없어 그냥 발길을 돌려야 해 아쉽다. 대신 방명록에 "당신이 원고지에 비문처럼 새겨 혼불로 남긴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 후세들에게 지대한 정신으로 이어지길..." 이라는 몇 소절을 남기고 문학관을 나선다.

 

염정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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