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최명희 문학숨결 머문곳에 황손의 거처 /유성문(여행작가)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9-04-07 09:12
조회
2549

유성문의 로드 에스프리]최명희 문학숨결 머문곳에 황손의 거처

ㆍ‘혼불’의 고향 전주

ㆍ소설 속 ‘완전한 누리’… 작가 전주서 영면

저 아득한 상고(上古)에 마한의 오십오 개 소국 가운데서, 강성한 백제가 마한을 한 나라씩 병탄해 올 때, 맨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전라도지역 원지국(爰池國)의 수도 원산(圓山), 그 완산, 전주. 그리고 빼앗겨 능멸당해 버린 백제의 서럽고 찬란한 꿈을 기어이 다시 찾아 이루겠다고 꽃처럼 일어선 후백제의 도읍 완산. 그 꿈조차 짓밟히어, 차현 땅 이남의 수모 능욕을 다 당한 이 땅에서 꽃씨 같은 몸 받은 조선왕조 개국시조 전주 이씨 이성계. 천 년이 지나도 이천 년이 지나도 또 천 년이 가도, 끝끝내 그 이름 완산이라 부르며 꽃심 하나 깊은 자리 심어 놓은 땅.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 꿈꾸는 나라. -최명희 <혼불> 중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는 전주 경기전 뒤로는 온통 한옥마을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황손이 산다. 이석(69). 우리에게는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엄연히 궁에서 나고 자란 마지막 황손이다. 그는 2004년부터 전주시에서 마련해 준 한옥마을 내 승광재에 머물고 있다.

 

승광재의 사랑방에는 고종황제의 사진이 걸려 있다.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의 어진과 조선조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는 고종의 사진. 그 두 왕의 초상 사이에는 500년이 넘는 왕조의 지난한 역사가 숨어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황손의 삶 역시 기구하고 험난한 것이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메아리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이석 노래 ‘비둘기 집’고종의 2남 의친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생활고 때문에 노래를 불러야 했고,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였지만 정작 그는 여러번 이혼을 했다. 10·26사태 후에는 ‘쫓겨나듯’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고, LA 근처에서 작은 식품가게로 겨우 끼니를 때우다 강도를 열세번이나 당했다. 10년 뒤 한국에 돌아와서 아홉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생활고도 생활고였지만 마음의 병이 그만큼 깊었다. ‘황실 없는 나라에서 황손으로 살아 무엇하랴’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전주로 내려온 후 황손은 제법 안정을 되찾았다. 전주의 조경단은 그의 시조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는 현재 전주 이씨 종친회의 도움 등으로 황손후원회의 뒤를 잇는 황실문화재단의 총재도 맡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손으로서의 ‘존엄’까지 되찾은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전주에서 그의 역할은 관광홍보용쯤인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도 굳이 그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같다. 삶은 그렇게 현실로 ‘엄존’하는 것일까.

 

비바람 눈보라를 온몸에 맞으면서/가슴에 꿈을 안고 긴 세월 지켜온 너 허…/세상이 바뀌어 변해가도 사람이 바뀌어 달라져도/항상 너는 예를 다해 그 자리에서/향기롭게 웃고 소리 없이 우네 아…/아 숭례문 아/아 숭례문 영원히 빛나리 -이석 노래 ‘아! 숭례문’황손은 얼마 전 새 노래를 취입했다. 숭례문 화재 1주년을 맞아 발표한 ‘아! 숭례문’이라는 노래다. 작년 2월10일, 황손은 숭례문이 불타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밤새 통곡을 했다고 한다. 숭례문이 이씨왕조 500년을 지켜온 도성의 정문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새카맣게 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그 모습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무너진 것이 어찌 숭례문뿐이랴.

 

경기전 후문에서 승광재로 가는 길목에 최명희문학관이 있다. 최명희(1947~1998)는 전주 풍남동에서 태어나 한옥마을 일원에서 성장했다. 그가 필생에 걸쳐 써내려간 <혼불>은 전북 남원 사매마을을 주 무대로 하고 있지만, 그 혼, 그 꽃심만은 온전히 전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덕진동 건지산 중턱에는 그가 51세의 생을 마감하고 호젓이 누워있는 무덤이 있으니, 비록 시간을 거슬러 사매까지 시간여행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 대단원은 오롯이 전주로 되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전주의 이름을 보자. 이제 제군들이 부조(父祖)의 함자(銜字)와 휘자(諱字)를 똑바로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이, 그 음덕을 입고 살아갈 땅의 이름 또한 잘 알아야만 한다. 땅은 어버이이기 때문이다.” 역사 선생은 칠판에 백묵으로 강렬하게 ‘全州’라고 썼다. “전주는 온전 전(全)과 고을 주(州)로서 온전한 고을이란 말이요, 완산은 완전할 완(完)에 뫼 산(山)이니, 산의 고어가 ‘’인 것을 안다면 ‘온 들’이라, 완전한 뫼와 어울려 다함없이 완전한 산과 들, 즉 완전한 누리를 일컫는 말이다.” -최명희 <혼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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