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근면하게 일해 가솔을 굻기지 말라. / 최효찬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9-03-18 10:21
조회
2654

[명작으로 여는 리더의 톡 톡 톡(talk)]‘근면하게 일해 가솔을 굶기지 말라’ - 가족 ①


이 주의 명작 최명희 ‘혼불’

① 톡·톡·톡= “절 한 자리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친정, 외가, 진외가까지 다 보인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에 나오는 이 말처럼 이전에는 절을 잘못하다 혼쭐이 나기도 했다. 설날이 되면 집성촌에서는 집을 돌며 제사를 지내고 친척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린다. 그러다 보면 설날이 저물어간다. 이제는 세배 풍습도 많이 달라져 가고 있다.

절은 그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을 하는 모양새를 보고 그 집안의 ‘격(格)’을 평가하기도 했다. 더욱이 새색시는 시댁에 와 처음 절하는 자리는 친정 가문의 범절을 보여주게 되는 셈이어서, 단순히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다는 의례만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친정을 욕 먹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가끔 부모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전설을 듣는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부모님 역시 꽃다운 청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어머니는 열일곱 살 때 결혼해 1년을 외가에서 머무르고 이듬해 왔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서 신부가 친정에서 1년 내지 3년을 묵고 시댁으로 오는 풍습을 ‘묵신행’이라고 한다. 혼례를 치르고 신랑을 먼저 보낸 후 좋은 날을 받아 가는데 보통은 1년, 길면 3년이 걸렸다. 상민들은 대부분 삼일신행을 했다.

소설 ‘혼불’은 남원의 한 종가의 삶을 재현해 놓은 작품으로 억척같은 한 종부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인 청암부인은 ‘첫날밤’조차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그만 10대에 과부가 된다. 묵신행의 풍습에 따라 남편은 신부 집에 가 결혼식을 올리고 본가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열병으로 죽고만 것이다.

② 톡·톡·톡=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열아홉에 소복을 입고 종가에 들어선 청암부인은 이 다짐이 무색하지 않게 스러져 가는 종가를 재건하고 천석지기가 넘는 부를 축적한다. 어쩌면 요즘의 모든 가장들에게 마음속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 아닐까.

가족이 ‘자산’이 되는 시대

이즈음을 이른바 ‘가족 해체’ 시대라고 한다. 이혼 가정이 늘고 형제자매가 없는 청소년들이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 가족은 생존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공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가족은 위기 시에 생존의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가족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국가적으로도 출산이 장려되는 것은 인구가 국가의 자산이자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명절에는 집안에 사람이 북적거려야 사는 분위기가 난다. 소설 ‘혼불’에서는 식구들이 불어나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자로 들어온 아들 이기채가 대여섯 살 먹었을 때 청암부인 혼자 덩그렇게 앉아 양자 기채의 묵은세배를 받고, 마주앉아 가족들이 무탈하기를 빌며 무를 깎아 먹었다. 그리고 청암부인은 십여 년이 지나 며느리를 맞아들였고 딸과 아들을 낳았다.

③ 톡·톡·톡= 온 방안이 가득 다 내 식구로구나. 내 이제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청암부인처럼 어쩌면 아이가 탄생하면서 가족이 늘어나는 것이 재산이 불어나는 것보다 더 축복스러운 일이 아닐까. 아들 강모가 자라나면서부터 식구가 늘어나 설날이 참으로 꽃봉오리처럼 화사해졌다. 그리고 이어 손자며느리까지 보게 된 청암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느꺼운 심정을 가누지 못한다. 신방을 차리기 전에 신랑과 사별한 청암부인에게 가족은 장롱 속에 깊이 간직한 보물보다 더 값진 존재였던 것이다.

‘혼불’에서는 가장 팔자가 좋은 사람으로 하인인 순덕이 부부를 꼽고 있다. “명색이 상전인 나는 줄줄이 다 날리는 아들을, 알토란같이 옹골지게 기르는 순덕이가 나는 부러웠다. 순덕이 내외는 금슬도 내내 그렇게 좋았니라. 아까보고 또 마주치는데도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온 얼굴에 웃음이 피어 눈짓하고 지나치고. 장날이면, 아껴놓았던 물빛 치마에 휜 저고리 날아가게 차려 입고는 머리도 곱게 빗고. 만석이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어 대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에 햇살은 다사롭고 투명한 발을 내렸다. 이 세상에 순덕이 팔자를 누가 당하리.” 혹시 순덕이의 팔자가 부럽지 않으신지….

④ 톡·톡·톡= “사람은 누구라도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실해야 한다. 살고 난 뒷자리도 마찬가지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⑤ 톡·톡·톡= “앞에서 보면 그럴듯해도 돌아선 뒤태가 이상하게 무너진 듯 허전한 사람은, 그 인생이 미덥고 실하지 못하다”고도 했다.

이 말은 앞모습은 꾸밀 수도 있으나 뒷모습만큼은 타고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 귀천은 꼭뒤에 달려 있느니”라는 말도 있다. 뒷모습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앞모습에 신경을 쓴다. 누구나 나타나는 실적을 중시한다. 보이는 것에 따라 평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흔히 시각적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능력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전상보다 후상, 후상보다 심상

관상에서도 전상보다 후상, 후상보다 심상을 더 중시한다. 앞모습과 더불어 뒷모습을 챙기고 나아가 마음의 모습까지 관리할 후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람을 얻는 길이요, 격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일 아닐까.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기업,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⑥ 톡·톡·톡= “전상(前相)이 불여(不如) 후상(後相)이라”고 하여, 사람의 앞모습 좋은 것이 뒷모습 좋은 것만 못하며, “후상이 불여 심상(心相)이라”고 하여, 뒷모습이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 사람 마음의 모습이 바르고 훌륭한 것만 못하다고 했다.

청암부인의 아름다운 심상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사람은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해 자기 가솔을 굶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열 섬지기 짓는 사람은 이웃에 배곯는 자 있으면 거두어 먹여야 하느니라. 백 섬지기 짓는 사람은 고을을 염려하고, 그보다 다른 또 어떤 몫이 있겠지.”

어머니가 가뭄을 대비해 저수지를 조성하겠다고 하자 아들 이기채가 비용 문제 등을 들어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때 청암부인은 서로 ‘윈-윈’을 할 수 있다며 “연고 없이 다만 품을 팔러 온 사람에게는 삯을 쳐 줄 것이요, 소작을 하는 사람은 그 삯으로 소작료를 탕감하여 줄 것”이라고 말한다. 소작료를 탕감하면 지주 입장에서는 수입이 없게 된다. 하지만 저수지가 생기면 이듬해부터 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을 수 있게 되고 또한 일한 사람들은 양식과 품삯이 생기니 일거양득이다. 한 해 수입을 얻지 못하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마주치면 흔히 장기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기적 관점에서 결정을 내리기 쉬운데 이는 리더의 자세가 아니다.

⑦ 톡·톡·톡= “세상에는 공것이 없느니. 내가 정성을 들이면 들인 만큼 내 앞으로 쌓이는 법인데, 정성 한 톨 쌓지 않고 무슨 염치로 해 뜰 날을 바라는고. 제 대접은 제가 받는다.”

국가적인 경제 위기로 한국판 ‘뉴딜’ 정책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요즘, 누구나 청암부인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부자들을 절실하게 보고 싶을 게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려운 때일수록 존경받는 부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곤 했다.

한편 ‘혼불’에서는 노비 신분인 춘복이의 석세스 스토리가 눈물겹다. 반가의 여성인 강실이를 흠모하는 춘복이는 마침내 강실이를 범하고 만다. 이는 신분 질서에 대한 춘복이의 ‘강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부잣집 딸인 윤옥자를 강간하는 염상구의 또 다른 자화상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양식은 재물로는 채울 수 없다.

⑧ 톡·톡·톡= “내 가슴이 내 양식이라. 내 마음이 나의 시량(柴糧)인즉.”

이전에는 ‘그 집안 장독대를 보면 가격(家格)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장독대가 사라진 아파트 문화에서는 무엇으로 ‘가격’을 알 수 있을까.

최효찬 소장은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

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문학박사 roma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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