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김언호)‘혼불’처럼…어둠에서 밝음을 찾아낸 그의 문학은 그리움이다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0-02-26 23:55
조회
1074

출처: 경향신문 2020년 2월 27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2252155005&code=940100

 

 

경향신문 20200227 최명희(김언호의 글).jpg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5)‘혼불’처럼…어둠에서 밝음을 찾아낸 그의 문학은 그리움이다

 

 


최명희, 손으로 바위를 뚫는 집필 작업

 






최명희는 만년필주의자였다. 속도가 아니라 정확하고 반듯하게 쓰는 것이 그의 자세였다.

최명희는 만년필주의자였다. 속도가 아니라 정확하고 반듯하게 쓰는 것이 그의 자세였다.











                

장편 ‘혼불’이 출판된 1983년 
일거에 읽고, 작가를 만났다
후속작을 계속하자 했고 
요절하기 전 7년2개월 동안
대하소설이 월간지에 실린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崔明姬, 1947~1998)를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5월이었다. 1981년 5월,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000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소설 <혼불>이 연재를 끝내고 1983년 책으로 나왔는데, 작가는 서명한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나는 그의 <혼불>을 일거에 읽었다. 그 어떤 작품과도 비견될 수 없었다. 아, 이것이 문학이구나 했다.

■ 찬란하게 아름다운 소설 <혼불> 

나는 그를 다시 만나 다하지 못한 작업을 계속하자고 했다. 그로부터 51세로 요절하는 1998년 12월까지, 작가 최명희와 <혼불>의 행로는 한 출판인의 운명이 되었다. <혼불>의 후속작업을 어떻게 진행할까, 그와 나의 주제였다. 드디어 ‘월간 신동아’ 연재가 기획되었다. 1988년 9월호부터 1995년 10월호까지 7년2개월 동안 85회가 연재되는 것이었다. 월간지 장기연재의 기록이었다.

그는 원고지에 글을 새겨넣었다 
나는 그의 ‘천필만필’이 좋다
옥중 박노해도 ‘팬레터’를 썼다 
무엇보다 그는 글을 사랑했고
어두운 시절 빛에 대해 썼다
 

그의 집필과 연재는 피 말리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최명희의 집필은 원고지 한 칸 한 칸에 글씨를 써넣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든 정신의 끌로 글자를 새겨넣는 작업이었다. 한밤을 꼬박 새우면서 한 줄도 못 쓸 때가 비일비재했다.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혼불>, 여성적인 넋의 고혹스러운 아름다움, 시대와 역사의 빛나는 서사를 풀어내는 대하소설 <혼불>은 작가의 고통으로 탄생되는 것이었다.

시의 언어로 조탁(彫琢)해낸 <혼불>, 그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남들은 한 번 쓰고 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일필휘지가 갖고 있는 한순간에 우주를 꿰뚫는, 정곡을 찌르는 강력한 힘도 있지만, 천필만필이 주는, 다듬어진 힘이 나는 좋다.” 

<혼불>을 읽을 때면 밑줄을 긋는다. 모든 문장이 나에겐 감동이고 신비다. <혼불>은 우리 문장의 높은 차원을 함축하는 미학이다. <혼불>은 상상력을 극한으로 이끈다. 글의 정신이다. 그의 글이 나의 가슴에 검푸른 칼이 되어 꽂힌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간다.”

최명희의 <혼불>이 탄생하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우리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하나가 되어 일어선다. 몸과 마음으로 권위주의자들과 격돌한다. <혼불>은 고단한 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무하는 힘이었다. 노동시인 박노해는 경주 남산자락 독방에 갇혀 있었다. 그는 <혼불>의 최명희에게 옥중편지를 띄운다. 

“매달 <혼불> 연재 기다리는 재미에 감옥 한 달이 어찌 가는지도 모른답니다. 피로 찍어 쓴 듯한 문장 문장에서 뿜어 나오는 기가 제 몸속 옛 기억을 짚어내는 순간, 불덩이처럼 솟는 시의 영감에 한동안 눈을 감고 얼어붙곤 합니다.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게 절로 경배하고픈 순간입니다. 이 땅의 한 많은 인생들 위해 저 푸른 목숨의 불, 혼불이 훨훨.” 

무엇이 그에게 <혼불>을 쓰게 하는 것이었을까. 

“나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 생물학적 생명체인 ‘나’를 있게 하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하여, 그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 형제들과 그보다 더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보(世譜)의 사다리는 항상 나에게 설레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혼불>은 여성의 아름다움이다. 여성의 지혜, 여성의 힘이다. 

“꽃피고 새 울어 온갖 나비 날아들고 열매 무성한 가지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남성의 제도적 특권이었다면, 묵묵히 그 모든 것을 견디고 당하면서 땅처럼 받아들여 어두운 눈물로 제 뿌리를 적시는 것이 여성이었다. 여성은 연약하지 않다. 여성은 근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어둠을 발효시킨다.”

■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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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연재가 끝나고 1년 동안 보완 집필을 통해 <혼불>을 완성했다.


 

작가는 연재를 끝내고 1년여 보완작업 끝에 <혼불>을 완성한다. 제1권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로 시작해 “온몸에 눈물이 차오른다”로 마감되는 제10권이 1996년 12월 출간되면서 작가에겐 한꺼번에 엄청난 상찬과 일들이 쏟아진다. 세상은 한꺼번에 그를 요구한다. <혼불>의 세상이었다.

1997년 6월 호암상을 받았다. 7월에는 단재상을, 10월에는 세종문화상을 받았다. 9월에는 전북대로부터 명예문학박사를, 12월에는 전북애향대상을, 1998년 1월에는 여성동아대상을 받았다.

작가 최명희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나는 그 상들의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그의 답사로 시상식이 진행되는 그 공간과 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순간 빛났다. 그의 답사는 강렬한 메시지가 되어 참석자들을 감동시키면서 시상식장 분위기를 아름답게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상을 받는 사람이 상을 주는 사람들의 품격을 높여주고 상의 의미를 승화시켰다. 호암상 시상식장에서도 최명희는 만장한 참석자들에게 행복한 기(氣)를 심어주는 답사를 했다. 

“말에는 정령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요. 저는 소설 속에 말의 씨를 뿌리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떤 씨를 뿌려야 할까. 이 일은 항상 매혹과 고통으로 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입니다. 저는 제가 오랜 세월 써오고 있는 소설 <혼불>에, 시대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쭉정이가 아니라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 

단재상 시상식에서의 그의 답사는 또 하나의 절창이었다. 

“그믐은 지하에 뜬 만월(滿月)입니다. 제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을 딱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어둠이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아주 강렬한 의욕을 불러일으킨 것은 우리 역사 가운데서 제일 어둡고 암울했던 시절인 일제강점기에 외부적으로는 국권을 잃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직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지키며 살고 있는 한 가문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 잃어버린 상태에서 진정한 자기 삶을 일궈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 

응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지만 
그는 혼불이 되어 날아올랐다
많이 쓰기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년필을 유독 고집했다
그가 그리워 ‘혼불’을 다시 든다
 

작가 최명희를 만나면서, 나이와 직업을 초월해, 그에겐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진실한 영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문학을 성원하는 친구들 모임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단재상 시상식에 참석한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발족시켰다. 역사와 인간의 저 깊은 내면의 어둠에서 빛을 길어내는 고독한 그의 작업을 응원하는 일을 친구들이 함께 감당해보자는 것이었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연마해내는 작업, 한국인의 정체성을 절절하게 탐구해내는 최명희를 이른바 문단의 주류는 주목하지 않았다. 나는 주류 문단 밖 친구들이 그를 성원하는 일이 더 의미 있겠다 싶었다. 그는 “쑥스럽다”고 했지만, “이제 <혼불>은 작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문화적 자산”이라며 그를 설득했다.



최명희의 육필원고.

최명희의 육필원고.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해 9월 가을이 깊어가는 저녁,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뒤뜰 야외무대 ‘별맞이터’에서 ‘혼불의 밤’을 열었다. 별빛이 쏟아지는 혼불의 밤,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좌장 강원용 목사는 “최명희는 <혼불>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했다. 명창 안숙선은 <혼불> 제1권의 “백초는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를 작창해서 노래 불렀다.

“이 별맞이터의 여러분들은 한 분 한 분이 저 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분들이 남루한 실 한 가닥인 저를 구슬 목걸이같이 알알이 꿰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실은 구슬 속에 숨어 있어야지 밖으로 나오면 구슬 목걸이는 빛을 바랠 것입니다. 저는 실로서의 소명을 다하겠습니다.”

11월엔 국립국어연구원이 작가를 초청해 ‘<혼불>과 국어사전’이란 주제로 강연을 듣는다. <혼불>은 아름다운 국어사전이다. 여성소설연구회는 ‘문학사의 새로운 지평: <혼불> 바로 읽기’ 세미나를 연다. <혼불> 독후감 대회가 열린다. 젊은 평론가 장일구가 <혼불읽기 문화읽기> <혼불의 언어>를 저술한다. 

그러나 작가 최명희는 2년의 투병 끝에 1998년 12월11일 오후, 운명한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나는 엎드려 울었다”고 하던 큰 작가 최명희는 혼불이 되어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올랐다.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혼불>은 내가 쓴 것이 아닙니다. 몇 천년 전 저 아득한 개국의 시원에, 사람이 되고픈 곰 한 마리에서부터 선조들, 우리의 조상, 현재의 우리들이 살면서 보고 느낀 삼라만상과의 교감, 그 누가 겪었던, 앞으로 내가 겪을지도 모르는 아픔과 고통의 정령이 <혼불>에 칸칸이 스며들어 나를 쓰게 했습니다.”

작가 최명희는 자신의 50세 생일날,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시중을 들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름다운 조각품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 아파했다.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추도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일찍부터 <혼불>의 문학적 성취와 가치를 발견한 김열규가, 영원한 고향 아름다운 정신 <혼불>을, 추도가 아니라 칭송하는 노래를 했다. 

“아! 크나큰 혼불이 떠나갔습니다. 아! 정말 치열했던 혼불 하나, 우리를 여의고 갔습니다. 떠난 것은 육신의 혼불일 뿐입니다. 그의 문학정신과 작가정신은 우리들 <혼불>읽기에 더 뜨거운 불길을 지필 것입니다. 우리들 문학사의 혼불로 타오를 것입니다. <혼불>은 이 시대가 낳은 민족의 대표적이고도 전형적인 이야기의 불씨로 여물어 갈 것입니다.” 

<혼불>이 출간된 직후 나는 작가에게 만년필을 선물했다.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구입한 리미티드 에디션이었다. 그의 만년필 글씨는 그 문장과 이야기처럼 아름답다. 그는 그 만년필로 글씨를 써보이면서 “참 부드러워요. 6부와 7부는 이 만년필로 써야지” 했다. 

작가 최명희는 만년필주의자였다. 기계와 속도의 디지털시대에 그는 아날로그를 고수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많이 쓰고 빨리 쓸 수 있고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면서 컴퓨터 쓰기를 권했지만, “많이 쓰고 빨리 써서 무엇을 남길 것인지 의아해진다”고 했다. 

그 만년필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그의 집필실을 방문했을 때 그 만년필은 작가 최명희가 <혼불>을 쓰던 앉은뱅이책상 위에 원고지와 함께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작가 최명희가 그립다. 어둠에서 밝음을 찾아내는 그의 문학은 그리움이다. 사람뿐 아니라 사물까지, 그리움으로 새로운 생명을 구현해내던 작가 최명희. 오늘 나는 다시 <혼불>을 읽는다. <혼불>은 우리 문학사의 고전이다. 

■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기도 하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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