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음악극 혼불이 나오기까지(작곡가 지성호)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8-10-11 13:04
조회
1541

출처: 작곡가 지성호 님의 페이스북

날짜: 20181011

내용:



 

난 원래 동아일보 애독자였다.

지금은 동아일보가 조중동의 말석을 차지하며 조롱의 대상이 됐지만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국민적 사랑을 받던 신문이었다.

박정희정권 때에는 사찰기관이 동아일보를 죽이기 위해 광고주들을 협박하여 일제히 광고를 해약시키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우리들까지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광고실어주기운동을 벌일 정도로 애정을 받던 국민신문 이였다.

그랬던 동아가 요 모양 요 꼴이 될 줄이야.

하여튼 어느 날 막 배달된 신문의 쌔~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지면을 넘기다 새로 연재를 시작한 <혼불>에 눈길이 갔다.

본래 연재소설을 읽지 않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1000만원 고료당선작이라는 대대적인 사내광고 때문에 어떤 소설 이길래...”

,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줄을 읽다가 그만 꽂혀버리고 말았다.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는 대나무 숲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해낼 수는 없었다.

글발도 사람에게 충격을 준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그 다음 날부터 <혼불>을 읽는 재미로 신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중에는 <신동아>라는 월간지에서 연재를 이어가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신동아를 구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혼불>은 그 줄거리가 흥미진진해서 책 읽는 재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땀 한 땀 공력들인 문체의 아름다움이 탁월하여 오래 씨-ㅂ은 음식의 단맛과 같이 음미되는 글맛을 준다.

작가가 <혼불> 속에서 구사하는 어휘가 6000여 가지라는 사실은 작가가 얼마나 적합한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을 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




 


20021월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동네는 겨울이면 일찌감치 내려온 모악산 그늘에 저녁이 빨리 찾아온다.

오후5시만 되면 동네엔 인적이 끊기고 흩어진 집들은 세상과 격리된 외로운 섬으로 변한다.

저녁10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 동네 시간으론 오밤중이다.

받아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망설였다. 이 늦은 시간에 오는 전화는 불길한 공포심을 줘 가슴을 뛰게 한다.

그날 이후로 생긴 트라우마이다.

그날,

새벽 두시에 전화벨이 울렸을 때 잠결에도 가슴이 섬뜩했었다.

전화선을 타고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

허둥지둥 행장을 꾸려 문을 여니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 앞에서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공포가 몰려와 거의 주저앉을 뻔 했었다. 결국 어둠이 물러가는 새벽이 돼서야 길을 나설 수가 있었다.

...........................................

전화벨은 집요했다.

참다못해 수화기를 드니 전주시립관현악단을 지휘하는 심인택 교수였다.

11경에 우리 집에 도착할 터인데 만나서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였다.

무슨 일이죠? 이 오밤중에...”

하여튼 찾아가서 말씀 드릴께요!”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은 분명한데 무슨 일이지?

아내를 깨워 차를 준비하라 이르고 심교수를 기다렸다.




 


이야기인즉슨 2002년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전주시는 차제에 전주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문화상품을 만들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시립5개 단체가 참여하여 <혼불>을 원작으로 한 대서사음악극<혼불>을 제작하기로 조금 전 회의에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는,

이미 이 일을 위해 시도한 다른 작품이 관계자들과 언론의 혹평으로 책임자가 물러나는 불상사가 발생했기 때문에 아무도 뛰어들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가 <혼불>을 하겠다고 우겨 결정 난 사항이라 이 작품 또한 잘못된다면 자기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다친다는 것이었다.




 


: 그 위험한 일을 왜 한다고 했어요?

: 언젠가는 <혼불>을 꼭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이 그 기회라고 생각해서요.

: 하이, !

: 지선생님이 이 곡을 꼭 써줘야겠습니다!




 


난 이야기 도중 막연하게 여러 작곡가들이 장을 나누어 쓰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나보고 전편을 다 써야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 뭐라고요? 하필 왜 납니까? 내가 미쳤어요?

그게 딱 죽을자리고만요, 그걸 왜 내가 써요! 난 못합니다!




 


문제는 이때였다.

평소 손님과의 대화에 절대로 나서지 않는 아내가 차를 내면서 불쑥 내뱉는 말이

아니, 작곡가가 죽더라도 곡을 쓰다가 죽어야지 왜 못쓴다고 해요?”

나는 순간 말을 더듬었다. 이런 일 한 번도 없던 아내의 돌발적 행동에 많이 당황하기도 했었다.

: ... .....그러니까......, 알았습니다. 쓸께요. 둘이 같이 죽읍시다!




 


이런 전차로 나와 <혼불>의 인연이 맺어지게 된 것이다.

이 결정 때문에 난 정말 곡을 쓰다가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최명희 선생 유족들은 나와 대본작가를 두 번이나 불러내 원작에 누가 될까를 염려하는 기색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공무원들을 비롯한 책임 있는 사람들도 유래 없는 제작비를 들여 성공하지 못하면 여러 사람 다친다는 걱정을 은복진행으로 전달했다.

그때마다 난 작곡자로서 진인사대천명 할 뿐이며 성패는 귀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대응했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면 전문예술인 200명이 투입되고 런링

타임 3시간 반이 넘는 대곡을 2월에 시작해서 6월 월드컵에 맞춰 무대에 올린다는 발상이 얼마냐 황당한 발상이냐 말이다.

이 정도곡이면 적어도 2년은 작곡시간을 줘야한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때 내 메모를 살펴보니 215일 작곡을 시작해서 66일 현충일 날 탈고한 것으로 나와 있다.

난 이 기간 동안 그야말로 초인적인 노력으로 작곡에 집중했다.

잠은 3시간 이상을 자본 기억이 없고 그나마도 쪽잠이었다.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면 내쳐 잘 것 같아 양말도 벗지 않고 옷도 입은 채 불편한 잠을 잤다.

내가 이때 깨우친 것이 극한의 상황에선 몸이 정신을 따라간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면도할 시간이 없어 방치한 것이 내가 수염을 기르게 된 내력이 되겠다.

아내도 어떡하든 내 체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부분, 부분 악보가 완성 되는대로 시립단체에 전달돼 연습에 들어갔다.

시립단체는 단체대로 고생이 자심하였다.

이런 난리 끝에 무대는 올라갔다.

공연은 대박이었다.

이미 연습과정에서 입소문이 났는지 공연시작 두 시간 전부터 모악당 앞 광장에 줄이 끝없이 늘어섰고

좌석이 만석이라 입장을 통제하면 실랑이가 벌어져 소란이 벌어지곤 했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유리창이 깨지고 통제가 불가능해 시청직원들이 피하는 일도 일어났다고 들었다.

그런 까닭으로 좌석이 아닌 통로에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공연을 보는 전무후무한 일도 벌어졌다.

물론 시청차원의 대대적인 홍보와 무료공연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된다싶었던지 도지사, 시장도 관람하고 국회의원들도 들어왔다.

..............................




 


<혼불>은 무명 작곡가 지성호를 세상에 알리는 기회였다.

말하자면 데뷔작인 셈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실감났다.

이 공연 이후로 오페라 작곡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감히 오페라 작곡가가 된다는 생각은 꿈도 꿔보지 못한 일이었다.

모든 작곡가들의 궁극의 소망인 오페라 작곡가라니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의 인생에 기회는 분명히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기회가 온지도 모르고 지나치고

어떤 사람은 준비가 안 돼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애들아, 그러니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자기 것으로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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