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맛 따라 멋 따라 찾아야 할 전주(이종희)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5-07-27 20:59
조회
2554

맛 따라 멋 따라 찾아야 할 전주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 종 희

조선시대 전주지방의 대표적인 특징을 말할 때 인심을 들었다고 한다. 보부상들이 장사를 마치고 떠날 때는 후한 인심을 잊지 못해 절을 몇 번씩 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전주 톨게이트에 들어서면서 한옥 처마 밑 고풍스런 단청의 느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은 전통의 고장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 엄마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해진다.

맛과 멋을 아는 서울 사람들이 전주를 찾으며 하는 말이 있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와도 서울보다 싸다고 한다. 음식이든 술이든 서너 명이 한 상을 받아 주거니 받거니 먹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파묻힌다. 차려 놓은 밥상의 음식들이 오랜 시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처럼 음식은 음식대로 술은 술대로 주문하면 손님의 지갑이 쉬이 얇아지겠지만, 전주는 그렇지 않다.

식사 겸 술도 한 잔 얼큰하게 한 다음 2차를 가면 좋은 곳이 많다. 물론 비용이 저렴해야하는 것은 필수다. 호탕하게 막걸리를 좋아하는 주객들은 막걸리 집 주모가 손짓한다. 3병씩 담은 막걸리 주전자와 상다리가 휘어지는 안주에 너도 나도 입이 벌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주전자가 바뀔 때마다 술잔을 재촉하는 추가 안주에 나도 모르게 술잔을 비운다. 낡은 양은주전자에 쭈그러진 술잔, 여기에 한 상 가득 놓인 안주는 주객들의 흥취를 돋울 수밖에.

늦게까지 마신 술로 작취미성昨醉未醒이며, 뱃속이 아릴 때 안성맞춤인 전주콩나물국밥은 속을 확 풀어주며 아침을 상쾌하게 열어 준다. 콩나물국밥이 맞지 않으면 선지해장국, 시래기국밥, 순대국밥, 황태해장국 등 기호에 맞추어 골라 먹을 수 있다.

전주에서 맛을 즐길 수 있는 음식은 이뿐이 아니다. 도내에서 생산한 재료를 사용하는 한우전문음식점, 주변의 맑은 물에서 잡은 민물고기에 질 좋은 시래기를 넣은 매운탕, 신선도를 으뜸으로 하며 바닷가보다 싼 횟집들이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품격 있는 손님들과 국악을 감상하며 식사할 수 있는 전주한정식은 상호간의 신뢰를 구축하기에 좋은 곳이다. 가끔 자식들이 사는 서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특징 있는 음식이 많은 곳이기에 이내 접고 만다.

전주는 맛과 더불어 멋을 아는 고장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쥘부채(합죽선)를 척 펴면서 판소리 한가락을 뽑아 올리는 그 모습이야말로 멋쟁이가 아니던가. 아낙네의 정성어린 손바느질로 만든 한복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내 사진이 많이 있지만 장인 회갑 때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제일 화려하고 멋있어 가끔 꺼내본다. 그뿐인가. 소리를 하는 사람의 손에 들린 쥘부채야말로 장인의 혼이 밴 창작물이다. 우리 고장의 대나무와 닥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전주한지에 한국화를 그려 넣은 합죽선은 조선 멋쟁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전주한옥마을에는 이와 같이 멋을 만들어내는 곳이 많다. 노점상들의 호객에 끌리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눈여겨보고 체험하면 감탄할 곳이 참으로 많다. 한지제작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전주전통한지원, 부채의 이모저모를 체험할 수 있는 전주부채문화관, 기록문화와 출판문화를 알 수 있는 전주완판본문화관, 판소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주판소리문화관, 여러 가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전통문화관 등이다. 또한 한옥마을 가까운 경원동에 전주한지문화관이 있어 많은 관람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두 해 전, 손자 셋을 데리고 한나절을 체험시킨 일이 있는데 멋을 알았는지 너무 즐거워했었다.

또 전주한옥마을에는 강암서예관이 있어 추사의 글씨와 강암 선생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고, 수많은 서예대가들의 후학들이 묵향에 젖어 곳곳에서 서예를 익히고 있다. 더불어 ‘혼불’ 작가 최명희문학관에서는 구수한 전라도사투리에 얽힌 작품을 감상하려는 발길이 줄을 잇기도 해, 또 다른 멋을 맛볼 수 있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들어서 어렴풋하게 기억되는 전주의 대표적인 음식을 찾아서 먹어보며, 풍류를 즐겨보는 여유로움이야말로 바로 멋쟁이가 아니겠는가.

나는 가끔 고유의 음식을 먹으면서 그 깊이를 음미하기를 좋아한다. 음식마다의 특징, 음식점마다 다른 요리법이 나를 새롭게 해준다. 가족이나 친지와 함께 오붓하게 식도락을 즐기는 즐거움이 꽤 쏠쏠하다. 이래서 서울사람들이 ‘서울에서 먹는 것보다 교통비가 들어도 전주가 싸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는 것을 최대한 누리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KTX까지 개통되지 않았던가?

‘혼불’ 작가 최명희는 전주를 가리켜 ‘세월이 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의 꽃심을 지닌 땅’이라고 했다. 전주를 ‘꽃심’으로 표현한 것이다. ‘꽃심’은 언제나 새로움과의 만남이라는 진보적‧중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삶의 여유와 풍류가 판소리의 멋과 해학을 낳고, 한지의 서화를 부르며, 천 년 전주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에서 먹을거리는 빼놓을 수 없다. 나는 한 가지 버릇이 있다. 여행지가 결정되면 그곳을 대표하는 음식을 찾는다. 먹는 즐거움이 없으면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아서 때깔 나고 먹어서 맛깔스런 음식, 멋을 알고 여유롭게 삶을 즐기는 인심 좋은 전주 말고 어디에 가서 그 맛과 멋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2015.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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