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김욱의 그 작가 그 작품(15)소설가 최명희의 ‘혼불’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5-11-12 09:36
조회
2607
출처: https://www.nongmin.com/article/20151107054264


김욱의 그 작가 그 작품(15)소설가 최명희의 ‘혼불’

나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그리고 혼

1930년대 말 전라도 남원의 매안 이씨 문중 배경
무너져가는 종가 지키기위한 종부와 남루한 남도 백성들의 인생 형상화
강인한 우리 민족의 혼 그려
15년간 작품 ‘혼불’에 매달린 작가…원고지 1만2000장, 10권의 역작 남겨
인간의 시작에 대한 물음·대답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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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채피 여자가 나이 들면 시집이라능 걸 가기는 가얀디, 나는 집도 가난허고, 부모도 멀리 지싱게, 머 부자 혼인은 바라도 못허고, 또 저쪽으서 남자네가 우리보고 가난하다고, 볼 것 없다고 퇴(退)나 노먼 오도가도 못헐랑가, 매급시 그런 생객이 들대요. 에이, 가 보자. 거가 머이 있능가. 허고는 시집이라고 간 거이요. 긍게. 우리 옥란이가 많이 울었지라우. 내가 더 울고. 아이고오, 그런디, 그 담이 바로 지옥이여. 참말로 나, 누가, 너 시집 안 가먼 나 죽을란다고 목을 매도, 누가 시집가라먼 가지 말라고, 나는 도시락 싸들고 댕김서 말리고 싶어라우. 그 일만 허다가 죽어도 좋겄어어. 어치케나 징그런지.

- <혼불> 중에서

최명희(1947~1998)의 소설 <혼불>을 일컬어 세상 사람들은 애처롭도록 가냘프고 뜨겁고 강인한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소설이라고 부른다. 1930년대 말, 전라도 남원땅의 유서 깊은 매안 이씨 문중을 배경으로 무너져가는 종가(宗家)를 지키고자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종부(宗婦) 3대와 남도의 삶과 정신을 이어가는 이름 모를 백성들의 때론 천하고 남루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형상화한 <혼불>은 책으로는 10권, 원고지는 무려 1만2000장에 달하는 역작이다. 작가가 서른다섯 나이에 첫권을 발표해 쉰살이 되어서야 마지막권을 마무리한 필생의 작품이기도 하다.

집필하는 동안 종이에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혼을 새겨 넣는다는 심정으로 글을 대했다는 생전의 고백처럼 <혼불>에는 소설을 뛰어넘는 인간의 시작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서려 있다. 어머니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듯 이 땅에 마을이 생겨나고 민족이 일어난다. 장성한 아이가 어머니 곁을 떠나 그 숭고한 희생과 사랑을 잊어버리듯 어느덧 우리는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일구고 눈물 흘리고 피와 땀을 거름으로 안겨준 고향이라는 것, 근원이라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의 혼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야 말았다.

산이 먼저 목말라하면서 그만 뒤미처 둠벙만한 방죽의 바닥이 갈라져 버리는데, 사람들은 거북이 등짝처럼 터지는 방죽 밑바닥을 보고 있으면 심정도 따라서 터지고, 입술이 말라들어 허연 꺼풀이 일어났다.

본디,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던 매안서원(梅岸書院)의 서원답(書院沓)을 경작하는 데 쓰려고 팠던 손바닥만한 방죽 하나에 의지하여, 여름마다 고초를 겪으면서도 달리 어쩌지 못하고 농사를 지어왔으니, 굳이 농수(農水)만이라고 할 것인가. 마을은 늘 물이 모자랐다. 샘 바닥마저도 걸핏하면 뒤집혀 붉은 흙탕물이 되고 말았다.

- <혼불> 중에서

15년간 <혼불>이라는 작품에 매달리면서 최명희는 작가로서는 영예를 얻었고, 여자로서는 독신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난소에서 발견된 암이 꽃잔디처럼 온몸으로 전이되어 작품을 끝맺은 2년 후 겨울에 ‘거짓이 아닌 글을 썼으니 행복하다’는 말을 남기고 아쉽게도 생을 마감한다.

외로웠으나 누구보다 뜨거웠던 최명희의 삶은 지금도 이 땅 곳곳에 새겨져 있다. 딸을 키우는 어머니, 머잖아 어머니가 될 어린 딸들, 추수가 끝나고 겨울을 기다리는 빈 들판과 나락이 흩어진 논 가운데에, 그리고 말라붙은 강가와 발전이라는 간판 앞에서 깎여지는 산중턱에는 오래 전부터 우리를 지키고 키워낸 조상들의 혼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최명희가 사랑한 남도의 사투리처럼 그 혼은 세월이라는 풍파 앞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올 한해, 참으로 기가 막힌 가뭄에 몸살을 심히 앓았다. 이 가뭄은 생각건대 물이 없어 다급해진 갈증만은 아니다. 거북 등짝처럼 갈라터진 저수지 밑바닥은 우리네 정서이기도 하다. 효(孝)와 예(禮)와 덕(德)이라는 우리네 혼을 상실한 한국인의 마음속도 고초를 겪어 뒤집힌 흙탕물 같다. 그 애달픈 마음을 지켜내려고 모진 한 세월을 온전히 바친 소설가 최명희의 삶이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감사히 여겨지는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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