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시와 소설로 읽는 전주한옥마을(2)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5-04-29 11:27
조회
2732


매체: 새만금일보
날짜: 2015년 4월 6일
제목:시와 소설로 읽는 전주한옥마을(2)





 


○최명희의 「만종(晩鐘)」
최명희의 단편소설은 그의 대표작품인 「혼불」보다 최명희 소설의 서정적 특징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경기전과 전동성당을 배경으로 한 「만종(晩鐘)」에서 나타나는 정서와 정적 소설이 보여주는 공감각화는 「혼불」의 전조가 된다.
「만종」은 최명희의 등단 이후인 1980년 발간된 전북대학교 교지 『비사벌 8집』에 실린 작품이다. 작품의 시공간은 1980년 제61회 전국체전 준비로 개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전주 경기전과 전동성당, 중앙초등학교, 태조로 등이다. 작품은, 전주시에서 전국체전을 계기로 도시 전체를 단장한다며 대공사를 진행함에 따라 전시적인 효과만을 생각할 뿐 과거의 전통이나 정신적 뿌리를 고려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사에 담긴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나의 쌈터였던 경기전에는 맹오리 영감이라는 터줏대감이 있고, 그 맞은 편 전동성당에는 봉사 할멈이 있다. 이 일대는 요즘 전국체전 준비를 이유로 재단장이 한창이며, 공무원의 불도저가 파헤친 것은 단순히 낡은 건물만이 아니라, 거기 함께 묻어둔 우리네 추억과 거기에 기반을 둔 삶 전반이었다. 작품은 주인공의 즐겁고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에 맞추어져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전주의 풍물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일반적인 최명희 소설의 특징들을 부분적으로 보여주지만 뚜렷하게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과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에서는 서정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뚜렷이 드러낸다. 즉 언어의 시각화를 위한 잦은 행갈이, 시각화와 동시에 청각화를 일으키는 공감각화가 그것이다. 공감각화를 통해 일어나는 어지러움증은 바로 과거의 것은 무조건 자르고, 밀어버리며 근대를 향해 달려가는 현대병이다. 현대병은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기린봉 푸른 밤하늘, 시리도록 흰 달이 걸리면 두렷하게 드러난 능선을 타고 달빛은 흘러 아름다움 한껏 부린 전주, 한벽루 옥색 물소리에 흥건히 잠기는데……. 본디 전주 형상을 일러서 옥경청람(玉京晴嵐) 만경창파(萬頃蒼波) 행주지형(行舟之形)이라고 그랬다. 화창하게 개인 날 아른아른한 아지랑이 속에서 만경창파 푸른 물결로 배를 띄워 떠나가는 형국의 지세(地勢)라. 전주사람들이 유독 아끼고 사랑하는 경치가 여덟인데, 이를 전주 8경이라 이른다. 동으로 솟아오른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을 일러 기린토월이라, 제1경을 삼고, 전주천 기슭 한벽당 풍정을 말하는 한벽청연이 제2경이요, 남고산 저녁노을 헤치고 울려오는 남고모종이 제3경이요, 전주천 빨래하는 풍정을 말하는 남천표모가 제4경이요, 덕진연못 연꽃 꺾는 덕진채련이 제5경이요, 위봉사 아래 옥으로 부서지는 폭포가 있으니 위봉폭포라 제6경이요, 한내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를 비비낙안이라 일러 제7경, 고산과 봉동의 냇물에 낚싯배 오르내리는 것을 동포귀범이라 하여 제8경을 삼으니, 전주 팔경하면 못 보아 한이 될 만할 것이로다.

 

○한벽당과 전주 문학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이다. 한벽당은 전주뿐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그칠 새 없이 찾던 곳으로 옥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 같다 해서 한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한벽당은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을 딛고 오르면 바람소리, 물소리가 어우러진 그윽하고 창연한 한옥 누각이 날렵한 자태로 객을 맞는다. 복잡한 세상에서 한 걸음 비켜난 듯한 느낌. 이운룡 시인도 시 「한벽루」를 통해 ‘햇살도 햇살꽃이 피고 지는지/햇살 속에 벙그는/투명한 하늘’ 아래 ‘참빗살 새로 빗어 내리는/아침 햇빛 속에/한벽루가 얹혀 있다’고 소개한다. 단아한 풍류와 은은한 묵향이 느껴지는 한벽루(寒碧樓)다. 상관의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맑은 장풍에 속진(俗塵)을 씻어내고 마주치는 남고산성 남고사에서 은은히 울리는 종소리는 운치를 더한다. 옥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치는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와 같다 해서 한벽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예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을 유혹하여 시심을 부추긴 곳으로 유명하다. 『호남읍지』에 한벽루를 제목으로 읊은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김진상 등 열 아홉 명의 시문들이 수록돼 있는 것을 보면 한벽루가 온고을의 풍류와 예술의 중심무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악산 시인’이라 불리는 박남준 시인에게도 한벽루는 특별하다. 그 추억은 장편(掌篇)소설 「한벽루의 이별, 그 기억의 저편」에 소상하게 적혀 있다.
전주천을 배경으로 한 최명희의 미완성 장편소설 「제망매가」에는 창암의 이야기가 꽤 많다. 최명희는 창암을 ‘한 자루 붓에 생애를 담고, 오직 서도삼매로 한 세상 살다 떠난, 천성의 명필’이라고 소개했다.
때는 몹시 무더운 한여름 폭양(曝陽). 한벽당 누각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듣고 있는 창암의 곁에 온통 후줄근한 땀에 젖은 부채 장수가 한 짐의 부채를 부려놓았다. 그러고는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비스듬히 드러누워 스르르 낮잠에 빠져들었다. 고단한 부채 장수가 잠시 꿈같은 낮잠을 달게 자고 눈을 떠보니, 이게 웬 일인가. 부채들은 반달처럼 활짝 활짝 펼쳐져 있고, 그 부채 낯바닥에는 환칠을 한듯 시커먼 먹물로 쓴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바로 머리맡에서 지금 누군가 한참 붓대를 내두르면서 남은 부채에다 계속 글씨를 써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부채 장수는 선비의 조용한 말씨와 말하는 품격으로 보아 예사 선비가 아닌 것을 눈치 채고는 허실 삼아 그 부채를 들고 아까 돌았던 동네를 다시 한 번 가보았다. 헌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고, 구경을 하고, 흥정을 했다. 선비의 말대로 값을 좀 올려 받아도 아무 까탈이 붙지 않았다. 본디 눈치가 있는 장사인지라 이번에는 자리를 옮겨 아까보다 몇 배 더 값을 불러 보았으나 역시 군말이 붙지 않았다. 그사이 부채가 다 팔려 동이 나고 말았다. 선비의 말대로 아직도 해는 동동 떠 있었다.
부채 장수는 걸음을 되짚어 한벽당에서 선비에게 사과하고, 치사하며, 선비의 성함을 물었다. 창암 이삼만. 부채 장수는 속으로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외고 또 외면서,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 이야기는 정읍으로 옮겨가 난장에서 부채장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부채에 시문과 초화를 붓으로 그려 넣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부채를 사갔다는 내용으로도 전하고, 부채가 수 일이 지나도 하나도 팔리지 않다가 어느 중국 거상이 비싼 값을 주고 몽땅 사갔다는 내용으로도 전한다.
경기전에서 동쪽으로 몇 걸음만 가면 오목대(梧木臺)가 있다. 전주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 오목대, 앙징맞고 조그마한 비각 하나 서있는, 언덕같이 나지막한 동산 기슭, 그러면서도 전주 울안이 한눈에 들어와 안기는 이곳, 햇볕 당양한 양지밭을 좋아할 것이다. (*당냥하다: 햇볕이 잘 들어 밝고 따뜻하다.)

 

○오목대의 이성계와 만경대의 정몽주
오목대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경으로 개선하던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주에 들러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면서 중국 한나라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고려 말, 우왕(禹王) 6년, 경신 중추 구월 상천(霜天)에, 장군 이성계가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남정(南征)하여, 남원 운봉 황산(荒山)에서 노략질하며 날뛰던 왜구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승전고와 더불어 개경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때마침 전주부성에 당도하여, 이 도도록한 동산 허리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이 자신의 5대조 목조가 살았던 곳이라. 조상들이 기식(氣息)하다 떠나간 자취 아직도 역력한 옛 선영의 땅을 밟게 되니, 후손으로서 핏줄이 울리는 그리움을 어이 가누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아직도 이 부성에 사는 핏줄기 동종(同種) 종족(種族)들과 어우러져 한바탕 회포 어린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고조(韓高祖)가 먼저 불렀다던 대풍가(大風歌)라.
때마침 이 자리에는 종사관으로 함께 한 포은 정몽주가 있었는데, 새로운 왕조 개창을 암시하는 이성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서, 홀로 말을 몰고 남천(전주천)을 건너 지금의 남고산 만경대에 올랐다. 그리고는 만경대 벼랑에서 멀리 북쪽 하늘을 우러르면서 스러져가는 왕조의 한을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한 수의 시에 담아 읊었다. 이른바 ‘등전주망송대(登全州望宋臺)’다.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에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夫餘國)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구나. 9월 바람이 높아 나그네는 시름이 깊고, 10년의 호탕한 기상에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개경)만 바라보네. 스러져 가는 왕조의 한 … .
조기호 시인은 시 「남고모종(南固暮種)」을 통해 ‘포은 정몽주가 걸어옵니다. 만경대 바위계단 성 모퉁이를 돌아서 고려서 옆에 끼고 휘적 휘적 내려와 오목대에서 방금 도착한 이성계랑 손을 잡고 영점 몇 피피엠 도수 높은 전주천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라고 당시의 풍경을 그려놓았다. 종소리로 지어 놓은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견훤산성에는 종소리만 깊어갔으리.

/최기우 (극작가·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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