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전주대 김승종 교수) 『혼불』과 “한국의 꽃심 전주”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19-03-25 16:34
조회
1527

출처: 전주대 신문 제883호 2018년 10월 23일

글쓴이: 김승종 (전주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전주대신문.jpg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1947년, 전주 풍남동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고향은 남원이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던 최명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문재를 자랑하였다. 최명희는 갑작스레 부친을 여의게 되고 6남매의 장녀였던 최명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실질적인 가장이
된다. 최명희는 전주대학교 야간부 가정학과에 진학하였다가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로 적을 옮겨 이 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최명희는 1981년 <동아일보>가 창간 60주년을 기념하여 시행한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이 당선되어 일약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무려 17년 동안 10권의 『혼불』 집필에만 매달려 오던 최명희는 1998년, 향년 51세의 한창
나이에 지병으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혼불』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말의 남원, 전주, 만주 봉천 등이다. 이 시기에 추진된 창씨개명은 이 작품의 중심인물인 청암 부인을 병석에
눕게 만든다. 청암 부인은 국권 상실기에 지역의 숙원 사업이었던 저수지(청암호) 공사를 벌인 바 있다. “콩깍지가 시들어도 콩만 살아있으면
언제든지 새싹이 돋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던 청암 부인은 나라가 망했다는 이유로 실의에 빠지지 않고 저수지 공사를 과감히 벌인 것이다. 청암
부인은 단지 양반가의 종부라는 권위에 힘입지 않고 마을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고 덕을 베풂으로써 마을 사람들로부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청암 부인의 죽음을 앞두고 밤하늘을 수놓은 ‘혼불’은 청암 부인의 강한 정신력과 지도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양반들인 이기채와 이기표 등은 시대착오적인 권위에 편승하여 개인의 이익과 안일만 추구하다가 점차 마을사람들의 신망을
잃어 간다.

 

청암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청암호는 바닥을 드러내고 마을 전체는 혼란에 빠진다. 청암 부인을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의 부재가 매안 이씨
가문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다. 사촌 간인 강모와 강실의 근친상간, 춘복과 평순네를 비롯한 거멍굴 천민들의 원한과 분노,
종손인 강모의 방황, 춘복의 강실 강간과 강실의 임신 등은 양반의 권위와 양반 중심의 질서가 이미 시효를 상실했음을 시사한다. 결국 『혼불』은
청암부인 이후에 다가올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력’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독자에게 질문하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김병용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청암 부인을 중심으로 하여 양반 중심 질서를 유지하려는 구심력과 양반 중심 체제와 질서를 해체하려는
원심력이 동시에 작동하는 작품이다. 작가 최명희는 이러한 현상이 1940년대 남원 매안마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도 일어나는 보편적 역사 진행의 법칙으로 보고 있다. 2016년 6월 9일, 전주시청은 2년간의 연구와 시민과 자문위원들의 검토 과정을
거쳐 “한국의 꽃심 전주”라는 전주정신을 선포하였다.

 

‘꽃심’은 『혼불』의 주제를 담고 있는 단어로서 “시련과 역경을 끝내 극복하는 힘”을 말한다. 또한 ‘꽃심’은 약자를 배려하고 타자를
존중하는 ‘대동 정신’, 멋을 즐기고 삶의 질을 중시하는 ‘풍류 정신’, ‘공동체의 유익과 정의실현을 우선시하는 올곧음 정신’, ‘옛것을
물려받아 새롭게 창조하는 창신 정신’ 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제 최명희의 『혼불』은 전주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전주시민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드높이는 전주정신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작품이 지닌 뛰어난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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