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김택근)최명희와 ‘혼불’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7-05-25 12:21
조회
2429

최명희와 ‘혼불’

작가 최명희. 그는 생전에 단 하나의 소설에만 매달렸다. 너무나 곱고 맑고 슬프기에 대하예술소설이라 이름 붙은 ‘혼불’(전 10권·한길사)이 그것이다. ‘혼불’을 읽으면 아프다. 작가의 온 몸을 돌아나온 문장은 언제 읽어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귀기(鬼氣)가 느껴진다. 사금파리에 베인 듯, 꾹 누르면 핏물이 배어나올 것 같다. 동천(冬天)에서 한기가 쏟아지고, 팍팍한 황톳길이 아득히 펼쳐지고, 처연한 노을자락이 들과 마을과 삶을 덮는다. ‘혼불’은 일제시대 남원지방을 배경으로 종가를 지키는 여인 3대의 삶을 추적했다. 그의 글쓰기는 실로 무서웠다. 사람들은 그를 신들린 작가라 했다. 그 정치(精緻)함, 그 치열함, 그 준열함에 몸을 떨었다.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가며 새기는 처절한 기호” “미싱으로 박은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한땀 한땀 뜬 이야기” “옹골찬 여인들의 한많은 삶이 다져낸 넋의 아름다움” “우리 겨레의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내는 풍속사” “이 땅의 ‘이야기’ 역사가 오늘에 간직할 생명의 불꽃”.

그는 이런 찬사들을 뒤로 하고 1998년 12월 52년간 머문 세상을 떠나갔다. 차지고 구성지고 결이 고와 도저히 외국어로는 옮길 수 없는 소설, 소리내어 읽으면 판소리가 되는 소설, 주술적 힘과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소설. 작가 최명희는 17년간 ‘혼불’만을 썼다. 어쩌면 소설에 혼을 다 쏟아넣고 스스로 혼불이 되어 떠나갔는지도 모른다. 한번도 문단의 패거리에 끼거나 문명(文名)을 팔지 않았다. 홀로 우리 것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을 불어 넣었다.

‘혼불’의 배경인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령(朔寧) 최씨 종가에서 불이 나 12대 종부(宗婦)가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숨진 93세 종부는 소설에서 3대 며느리 중 한 사람인 ‘효원 아씨’로 그려졌다. 날아든 비보는 종가와 종부가 사라져가는 우리 시대에 무슨 암시일지도 모른다. 자식들을 도회지로 내보내고 혼자 종가를 지키다 변을 당한 종부의 마지막이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 최명희도, 소설 속의 실제 주인공도 이제 세상에 없다. 소설 ‘혼불’만 남았다. 하지만 ‘혼불’ 속의 인물들은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 튀어나올 것이다. 살아있을 것이다.

〈김택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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