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안의정)혼불 작가 최명희 선생의 원고지

작성자
작성일
2007-01-26 06:17
조회
2088

대작 ‘혼불’이 출간되기 1년전 쯤의 초겨울에 최명희 선생을 만났다. 뉴욕 브루클린 검찰청 검사로 있던 후배인 헨리 정과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4시간가량 수다를 떨었다.

선생은 대문학가 답지 않게 말이 많았고, 시장에서 흔히 만나볼수 있는 아줌마처럼 아무렇게나 말을 했다. 그렇게 소박하고 순수한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혼불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에요. 작품속의 인물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아요...내가 쓰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물었다.

“그럼 선생님이 창조하신 일종의 귀신들이 쓰는 것이네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선생님을 문학가라고 칭찬 말할 필요가 없겠네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폼을 잡으시고...”

“호호호호호...아휴 배꼽 빠지겠네...귀신이 뭐에요, 귀신이...내가 무당인가...혼이라고 해야죠...혼은 정말 있어요...한가지 경험을 말하겠어요. 오래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거든요. 횡단보도를 밤에 건너는데 분명 차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심하고 발을 뗐는데, 갑자기 앞이 훤해지는 것 있죠. 그리고 난 몰라요. 깨어나보니까 병원에 누워있는거있죠...참 이상했단 말이에요. 그런 사고가 일어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난 믿어요. 나를 아끼는 혼들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혼불이라는 걸작중의 걸작을 창조하고서도 자신이 아닌 혼들이 썼다는 말을 하다니...

“나는 10년 묶은 원고지에만 글을 써요. 생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원고지는 저 잘났다고 만년필 촉이 닿을 때마다 싸갓싸갓 소리를 내면서 잉크를 빨아들이지 않으려고 앙탈을 부리거든요. 그러나 푹 묵은 원고지는 내가 쓰자는 데로 따라오거든요...”

그말을 하는 선생도 푹 묵은 원고지처럼 겸손해보였다.

그후로 선생을 만나보지 못했다. 헨리가 선생이 걱정이 되어 여러차례 연락을 했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선생이 뉴욕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뉴욕 교포신문에 실리자 헨리가 숙소로 전화를 걸었다.

“정말 이럴겁니까? 유명 소설가면 나한테 연락을 하지 않는 겁니까?”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그렇지 않아도 나 야단 맞을 줄 알았어. 난 검사님이 바쁘실까봐 일부러 연락을 안드렸는데...”

“젠장...그런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문앞으로 나와요. 나 지금 코앞에 와있습니다.”

헨리는 선생을 모시고 허드슨 강변에서 화려한 밤의 맨해튼을 보게해주었다.

“아름다워...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저 불빛...하늘의 저 아름다운 별...미치겠어...아름다워서...”

선생은 소녀처럼 손벽을 치면서 좋아했다.

“이상하네...저 아름다운 빛들을 보니까 아버지의 양복 속주머니가 생각나네...아버지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으신 인텔리이셨어요. 그런 분이 나라가 걱정스러우셨는지 의식있는 친구분들과 술을 드시고 느지막하게 집으로 돌아오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내가 양복을 받아서 옷걸이에 걸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속주머니에게는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했거든요. 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 비밀 그리고 기쁨까기 그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 같았거든요...결국 한번도 아버지 양복의 속주머니를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저 아름다운 빛들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있고 나서 마침 한국을 방문중이던 헨리가 병원 영안실로 찾아갔다. 그때 한 유족이 위독하여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던 선생이 종이에 썼다는 내용을 들려주었다.

“이 세상에 미련은 없다고 하셨어요...소설도 혼불 한 작품이면 충분했다면서...그렇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었다고...”

오래동안 묵은 원고지처럼 겸손하게 살다가면서 걸작중의 걸작을 남긴 위대한 작가 최명희 선생다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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