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서지문)슬기의 2002년을 향해서

작성자
조선일보
작성일
2007-01-12 18:19
조회
1866
슬기의 2002년을 향해서


대하소설 <혼불>의 열렬한 애독자였고 작가와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이 작품의 독후감 심사를 두 해에 걸쳐서 하게 되었는데, 모두 작품에서 받은 압도적인 감동을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 해에 들어 온 독후감 중에서 아주 독특한 글이 한 편 있었다. 작가와 동갑내기 독자의 이 글은 <혼불>에 대해 크나 큰 저항감을 느끼게 되었던 때의 회고로 시작하고 있다.

"혼불이 내게 다가온 인연의 불씨가 시작된 것은 1981년 동아일보에서였다. 누구인가 소설 하나를 써서 2000만원을 받았다는 기사는 내게 충격이었다. 소설은 혼불이고, 작가는 최명희였다.
2000만원! 그 돈은 23평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같은 무렵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침 6시부터 밤 1시까지 코피 터지고 때로는 몸져누워 일을 해도 1년 동안 천여만 원을 모을 수 없었다.

가족을 만날 수도 목소리도 들을 수도 없는 사막은 너무 덥기도 하고 차갑기도 했다. 뜨거운 모래의 나라지만 계절은 춘하추동이 있었고, 겨울의 밤은 그곳도 여기 겨울 같은 차가운 체감의 온도가 있었다. 때는 어김없어 한가위에 올려보이던 달마저 서러웠다.

그런 뼈품을 파는 판에 겨우 책 한 권 써서 2000만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황당하게 느껴졌다. 그 뒤 세월이 가도 나는 혼불을 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책은 감정의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곁에 둘 책은 아니었다. 어쩌다 아주 오래 전의 초등학교 동창 소식처럼 혼불에 대한 조각 소식이 들렸고, 나는 미운 친구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를 듣고서 혼불이 긴 세월을 두고도 잊혀지지 않는다
니 이상했다.

세월이 갈수록 집 한 채 값을 받은 작가의 노고는 첫 작품이 당선되었던 시절에서 멎은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차츰 혼란스러웠다. 2000만원을 그뒤 세월로 나누니 그이의 노력은 너무 크고 그가 받은 보상은 너무 작았다."

이런 심정적 혼란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황종원 씨는 1998년 어느 날 라디오에서 작가의 육성을 듣는다.

"그이는 작품 속에서 말 고르기와 하나의 물건에도 배어 있는 혼을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2000만원 상금에 대하여 이웃사촌도 아니면서 배가 아팠던 빙산의 감정이 어느새 녹아내리면서 그이의 노고와 내가 겪었던 젊은 날의 고생이 서로 화답하면서 그이의 감정이 내게로 젖어 들어옴을 느꼈다.

그이, 최명희가 글을 쓰는 것은 내(우리)가 사막에서 목숨을 걸며 일했듯 그이에게도 생명을 거는 일이었나. 그이는 혼불을 세상에 출산하려는 치열한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목숨까지 걸고 있으니 서로 가는 길은 달랐어도 동지요 동료였다."

이렇게 해서 저항감을 극복하고 <혼불>을 읽게 된 황종원 씨는 책을 ‘마치 지은이의 통곡 소리 가득하여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몇 달 후에 작가가 타계하자, 황종원 씨는 그 젊은 날에 ‘배 아파했던’ 감정의 속죄로 작가 최명희의 발자취를 찾아 그가 살며 글 쓰던 곳을 찾아다니며 그 곳에 남아있는 작가의 혼백을 만나려 애쓰고, 그의 문학의 시원을 찾아 여고시절의 일기, 백일장에서 수상했던 작품들을 발굴해 내는 등, 전문적인 문학비평가가 해야 하는데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의 진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의식, 무의식 적으로 남의 일은 내 일보다 쉽고, 남이 그의 일을 하고 받는 보수는 내가 내 일을 하고 받는 보수보다 후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감정은 물론, 내가 하는 일의 힘듦과 고충은 너무나 잘 알지만 남의 일의 힘듦과 고충은 속속들이 알 수가 없는데 기인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자신에게 남은 알 수 없는 고충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고충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하련만 사람은 자기와 남을 똑같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고 공평하게 저울질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남의 떡’은 커 보이고 내 짐은 더 무거워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균형을 잃은 사고를 하게 되면 남에게 매우 부당하게 될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손해가 된다. 황종원 씨는 그 ‘배아픔’ 때문에 <혼불>이라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17년 동안이나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뒤늦은 깨달음이 그의 마음의 멍에를 벗겨주고 그에게 새로운 열정을 고취시켜 주었으므로 황종원 씨의 마음의 갈등은 아름답게 승화되었지만, 우리 사회전반에서 그런 ‘남의 떡’에 대한 시기는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더 많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정, 부패, 비리는 남들은 쉽게 출세하고 한 몫씩 잡고 사는데 나도 ‘눈먼’ 돈 좀 차지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낙오한다는 생각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무슨 무슨 게이트들이 터질 때마다 내게 놀랍게 생각되는 것은 그 게이트들이 사람들에게, 부정행위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고 나아가서 부정은 패가망신의 첩경이니 더러운 돈은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해야겠다는 결의를 심어주기보다 그 큰돈을 뇌물로 받아보지도 주어보지도 못한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부정한 돈을 흥청망청 쓰는 데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인간적 가치가 남이 나를 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액수와 동일한 것일까? 오히려 그 액수에 마이너스 기호를 붙인 값이 되는 것인 아닐까? 우리에게 정말 뼛속까지 만족을 줄 수 있는 돈은 뼈품을 판 돈 뿐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이 엄정한 진실을 똑바로 인식하는 현명한 국민이 되어 밝고 유쾌한 가정과 사회를 이루었으면 한다.

/서 지문 <고려대교수.영문학> 조선일보(200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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