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문신)'혼불' 읽으며 걷는 전주천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7-01-12 14:14
조회
1750


'혼불' 읽으며 걷는 전주천

느린 걸음으로 둘러보며, 눈길 닿는곳에 마음주며...





전주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전주천은 이 땅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에게 창작의 원천이자 산물이었다. 전주천이 보듬고 흐르는 한옥마을에서 나고, 어깨를 건 완산동과 다가동에서 자란 소설가 최명희에게는 더욱 특별했을 터.

특히 그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혼불’과 미완성 장편소설 ‘제망매가’, 단편소설 ‘만종’에는 전주천에 안겨 사는 이들의 삶이 세심하게 담겨 있다.

지난달 25일, 햇살 따사로운 늦은 가을 아침, 최명희문학관(관장 장성수·전북대 교수)은 전주천 일대에서 ‘소살소살, 전주천을 따라 흐르는…’. 을 주제로 기획행사를 열었다.

작가 최명희의 작품에서 전주천과 그 일대를 묘사한 부분을 찾아 느린 걸음으로 둘러보며, 눈길 닿는 곳에 마음 주며 걷는 ‘아주 특별한 행사’였다.

먼저 고백하면 이 행사의 이름에서 단지 ‘전주천’에만 마음이 머물렀는지 모른다. 그것은 화두처럼 덩그렇게 놓인 ‘소살소살’이라는 의성어 탓이 크다. 그래서 ‘소살소살’을 ‘속살속살’로 일부러 기분 좋게 오독(誤讀)해버렸다. 도대체 어느동네 냇물소리가 그렇듯 귀밑을 긁적이게 할 만큼 은밀하단 말인가!

첫 걸음은 ‘오목대를 옆구리에 끼고, 전주천 맑은 물에 그림자 드리운 한벽루를 슬쩍 바라보면서’ 시작됐다. 그곳에는 어슬렁 어슬렁 걸어도 좋은 길과 해찰하며 빈둥거려도 좋은 길이, 천(川)의 어깻죽지처럼 탄력 있게 놓여 있었다.

최명희 선생의 작품을 읽으며 전주천을 걸어보고 싶어 찾아온 사람들은 어림잡아 150여명. 헐겁다 싶었더니 웬걸! 키가 껑충한 억새들까지 한자리씩 차지하고 줄을 지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사람들과 억새, 그리고 전주천. 그렇다면 됐다. 주최측에서 먼저 제안했던 말. 진지한 표정이어도 좋고,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어도 좋다. 앞선 이들의 걸음을 놓치지 안고 부지런을 떨어도 좋고, 물소리에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며 머뭇거려도 좋다. 억새 사타구니에 바람 드는 소리에 숨죽여도 좋은, 그런 날, 굳이 ‘혼불’ 이야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날이었다.

‘혼불’을 읽어본 사람들은 안다. 이야기라는 것이 시위 떠난 살처럼 말문 열자마자 휘딱 날아가서는 그대로 과녁에 명중한다면 재미가 덜하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모두들 목적지를 정해두고 전주천을 걷는다기보다 ‘혼불’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그 행간을 자근자근 밟아 가는 것 같은 걸음새다.

행사 취지에 충실하게 참가자들은 예서 기웃, 제서 머뭇, 저편에서 어슬렁, 이편에서 뭉그적거렸다. 그 바람에 억새들도 덩달아 저들끼리 떼 뭉쳐 여기저기에서 키들거린다. 내처 우리와 함께 할 모양으로 소설 낭독 시간에는 참가자들보다 더 진지한 표정이다.

‘남고산성 자리는, 멸망한 후백제의 왕 견훤이 천하 강산을 얻고자 철옹성을 굳게 쌓으며 왕건에게 대적하던 견훤산성이었다. 만년을 가라 하면 길다 했으랴. 그보다 더 창창히 우거져 뻗어 나가고 싶었을 후백제….(‘혼불’ 제8권 123쪽)

아동문학가 김종필씨의 낭송이 이어지는 동안 참가자들은 침묵하고 억새들이 부르르 몸을 떨어댄 연유를 말해 무엇하랴! 전주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견훤대왕의 후예가 아니던가!

김성식씨(전 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가 동학 농민군의 전주부성 입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심중에 ‘혼불’하나씩 돋궈놓고 있었다.

전주 사람들이 모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야기꺼리가 많다는 사실을 그러한 비운의 역사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근대 출판 역사에서 전주가 서울 경판본과 어깨를 나란히 한 완판본의 고장임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전주천변을 중심으로 다가서포, 서계서포, 칠서방, 문영서관, 회현당, 양책방 등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을 돋을새김한 목판들이 얼마나 흔했으면 비온 뒤 질척거리는 전주천 거리를 판본으로 징검다리 삼았겠는가. 그 목판들이 진흙길에 찍어놓은 이야기 한 대목이 불쑥 떠오를 것도 같다. 새삼 최명희 선생이 전주천에 애정을 쏟은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저 물고기들처럼 전주천에 우글거렸겠는지를….

그 길을, 이야기가 흐르는 그 전주천의 길을 우리는 걸었다. 다시 보니 전주천을 흐르는 냇물이 뜻 없이 흐르는 것 같지가 않다. 냇물은 내 이야기 한 번 들어보라며 ?‘소살소살’ 흐른다. 그것은 가난하지만 부끄럽지 않고, 목청 높이지만 웃음을 버무릴 줄 아는 전주 사람들의 속살 같은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한벽교, 남천교, 전주교, 매곡교, 서천교 아래를 걸어왔다. 전주 사람들은 아침에 다리를 건너가서 사람을 만나고, 저녁에 건너와서 술잔을 기울인다. 다리 안쪽이 공적인 구역이라면 다리 바깥쪽은 철저히 개인의 영역이다.

다리는 공교롭게도 그 사이를 연결해주고 전주천은 그 사이를 나눠놓는다. 물길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물길을 닮는다고 했던가. 이 계절의 전주천이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것은 바로 다리 위를 오고 가는 우리 전주 사람들의 인정을 닮았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마침내 우리는 완산교 아래 도착했다. 오늘 여정은 여기까지다. 더 걸을 수도 있으련만 발길을 멈춘 것은 순전히 냇물 탓이다. 전주천 냇물이 완산교 아래에서부터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냇물은 오늘따라 너무 많은 이야기를 실었다. 우리는 줄곧 옆구리에 끼고 온 냇물을 그대로 놓아준다. 이 물들이 흘러가다가 머무는 어딘가에 전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잔뜩 부려져있을 것만 같다. 그것들을 판각해놓으면 그대로 완판본 대하소설이지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 전주천을 걸으며 소설을 읽고, 또 소설을 써보았다고 하면 외람된 표현일까. 소살소살 흘러가는 저 냇물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듯싶다. 그리하여 어느 날에는 전주천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완판본 대하소설을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최명희 선생이 ‘혼불’에서 묘사한 것처럼 ‘천년이 지나도 이천 년이 지나도 또 천 년이 가도, 끝끝내 그 이름 완산이라 부르며 꽃심 하나 깊은 자리 심어 놓은 땅.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 꿈꾸는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문신(시인)
/전북일보 2006.12.05 20:59

전체 13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36
근면하게 일해 가솔을 굻기지 말라. / 최효찬
최명희문학관 | 2009.03.18 | 추천 0 | 조회 2655
최명희문학관 2009.03.18 0 2655
35
여적 - 심상훈
최명희문학관 | 2009.03.18 | 추천 0 | 조회 2209
최명희문학관 2009.03.18 0 2209
34
[고장말] 먹고 잪다 / 이길재
최명희문학관 | 2009.03.11 | 추천 0 | 조회 2189
최명희문학관 2009.03.11 0 2189
33
예스 TV광주 - 염정금 기자의 문학관 르포
최명희문학관 | 2009.03.10 | 추천 0 | 조회 2586
최명희문학관 2009.03.10 0 2586
32
근면하게 일해 가솔을 굶기지 말라. / 최효찬
최명희문학관 | 2009.01.31 | 추천 0 | 조회 1951
최명희문학관 2009.01.31 0 1951
31
새전북신문 객원 논술위원 정상권 _ 최명희와 혼불
최명희문학관 | 2009.01.23 | 추천 0 | 조회 1887
최명희문학관 2009.01.23 0 1887
30
[박혜란에세이]사랑스런 사람 최명희
최명희문학관 | 2008.01.11 | 추천 0 | 조회 2626
최명희문학관 2008.01.11 0 2626
29
최명희 수필 기획특집으로 / 수필과 비평
최명희문학관 | 2007.11.20 | 추천 0 | 조회 2988
최명희문학관 2007.11.20 0 2988
28
「혼불」作家朔寧崔明姬之柩(혼불작가삭녕최명희지구)...
최명희문학관 | 2007.11.15 | 추천 0 | 조회 2243
최명희문학관 2007.11.15 0 2243
27
작곡가 임준희 / 혼불 교향곡
최명희문학관 | 2007.11.15 | 추천 0 | 조회 3000
최명희문학관 2007.11.15 0 3000
메뉴
error: 콘텐츠가 보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