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김규남)전라도 말의 '꽃심'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7-04-11 10:45
조회
3737
꽃열매.
꽃안주를 먹고 나니 꽃마음 만발하여 춤을 춰도 꽃춤이요,
노래해도 꽃노래라.


이 구절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풍류 한 판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서리 내린 국화로 담은 국화주, 오월 단오에 딴 앵두로 담은 술, 봄꽃으로 빚은 화전주, 배와 생강으로 만든 이강주 등, 술도 안주도 꽃인 까닭에 술기운이 돌아 흥취가 나는 것도 ‘꽃마음, 꽃춤, 꽃노래’가 된다. ‘꽃열매, 꽃안주’에서의 ‘꽃’은 재료지만, ‘꽃마음, 꽃춤, 꽃노래’에서의 ‘꽃’은 아름답고 화사한 꽃의 자태, 꽃의 속성이 마음에도 춤에도 노래에도 스며있는 것을 나타낸다.

‘꽃열매, 꽃안주’는 ‘-으로 만든’이란 요소를 넣어 의미를 선명하게 밝힐 수 있지만 ‘꽃마음, 꽃춤, 꽃노래’는 ‘같은’으로 대치해야 할 것들이며 그 단어가 사용되는 상황을 상상해야만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꽃열매, 꽃안주’는 ‘꽃 열매, 꽃 안주’로 띄어쓰기를 하는 게 낫다. 그러나 ‘꽃마음, 꽃춤, 꽃노래’는 띄어 쓸 수 없다. 구로 형성된 ‘꽃의 마음’이나 ‘꽃 같은 마음’, ‘꽃의 춤’이나 ‘꽃 같은 춤’만으로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단어다. 단어지만 사전에 없는 단어다. 그런데 사전에 없지만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단어고 그 단어가 주는 표현의 신선함과 의중을 충분히 동조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단어다. 이런 단어들을 흔히 ‘잠재어’라고 한다. 물론 이 ‘잠재어’들은 작가의 참신한 상상력과 조어력 덕분이며 또한 작가가 어려서부터 사용해 왔던 구체적인 한국어 변종 즉 방언의 생생한 언어적 토양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꽃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꽃심’이란 말이 사전에 물론 없어요. 그런데 저는 굉장히 그 말도 좋아요. 그리고 저희는 흔히 그 말을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 왜 ‘꽃심’이란 말이 없을까 그냥 너무나 애가 타요. 예 있든지 말든지, 난 있으니까…… 사전에 없으면 없나요? 뭐. 그러니까 그냥 저는 써 버린 거예요. ‘꽃심’”
(새국어생활 8권 4호에서)


작가 최명희가 말하는 ‘꽃심’에 대한 언급은 바로 작가의 언어적 토양을 이루고 있는 방언과 그 토양을 토대로 한 작가의 강렬한 표현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꽃심’은 무슨 뜻인가.

그 꿈조차 짓밟히어, 차현 땅 이남의 수모 능욕을 다 당한 이 땅에서 꽃씨 같은 몸 받은 조선왕조 개국시조 전주 이씨 이성계. 천 년이 지나도 이천 년이 지나도 또 천 년이 지나가도, 끝끝내 그 이름 완산이라 부르며 꽃심 하나 깊은 자리 심어 놓은 땅.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 꿈꾸는 나라. 결단코 잊지 않고 잃지 않고, 맨 처음 나라 받은 그 마음을 밝히면서 아직도 귀순 복속하지 않은 마한의 순결한 넋으로 옛이름 옛터를 지키는 전주 완산, 완산정, 완산칠봉, 완산다리.

이 구절은 전주에 대한 감상 즉 조선의 개국시조 이성계가 개국의 열정을 이곳에 심었던 곳으로 풀이하면서 그 시작되는 열정을 ‘꽃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으로 풀어내고 있다. ‘심’은 한자 마음 심(心)과 같고 힘의 방언형 ‘심’과도 같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욕구가 힘을 느끼게 하고 그 힘 있는 마음이 절묘하게 ‘심’ 속에 들어 있다. ‘꽃의 마음, 꽃의 힘’은 무엇인가. 꽃은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건조하게 말하자면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낳고 싶고 맺고 싶어 하는 그 간절한 생명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꽃심’에 대한, 작가 최명희의 해석은 그가 가진 남다른 언어 감각의 발로다.

한편 이 지역 방언 화자들은 ‘꽃심을 쓰다’ 혹은 ‘꽃심을 내다’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이 가진 온갖 힘을 다 쓰거나 내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 씨름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아이들이 서로 힘을 겨루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꽃심’ 쓰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젖 먹던 힘까지 아니면 기어코 이겨보겠다는 강한 의지로 말미암아 제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한곳에 모아 힘을 쓰는 그 순간이 바로 ‘꽃심’이다. 이 역시 앞서 말한 간절히 바라는 욕구가 힘을 느끼게 하지 않는가.

한편 ‘꽃심’에는 위에 언급한 것과 또 다른 뜻이 하나 더 있다.

비오리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꽃심이 진분홍으로 피어나는 복사꽃 가지 아래로, 남의 소실이 되어 집을 떠나갔다.

 

복사꽃을 들여다보면 꽃받침과 꽃잎 사이에 진홍빛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짙은 선 그것이 ‘꽃심’이다.

심(心)[명사]
1. <촉심(燭心)의 준말. 촛불의 심
2. <심성(心星)>의 준말
3. 죽에 곡식 가루를 짙게 뭉쳐 넣은 덩이. [팥죽에 넣는 새알심 따위]
4. <심지>의 준말
5. (무, 배추 따위의) 속에 든 질기고 여문 부분
6. (양복 따위의 어깨나 깃에) 빳빳하라고 넣는 물건. 양복 깃에 심을 넣다.
7. 연필의 목재 외피 속에 박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 부분. 연필의 심.
8. 나뭇고갱이


 

‘‘꽃심’의 ‘심’은 촛불 심지의 ‘심’이고 연필심의 ‘심’이다. 가늘고 여린 속성과 반면 질기고 야무진 속성이 동시에 한 단어에 들어있는 신기한 단어다. 단어 속에 들어있는 이 두 속성이 작가의 감성에 포착되었고 마침 힘과 심의 심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이 단어의 생동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오늘 이 일본이 우리를 잠시 친 것 같지만, 우리를 지렁이로 폄하해서 군화발로 무참히 짓밟겠지만, 우리는 짓뭉개진 오욕에도 결단코 죽지 않을 것이네. 밟은 그 발보다 오래 살아서, 우리 이름 우리 혼을 이어갈 것이야. 개한테 물리어도 생살을 돋아나듯이.” 가슴에 꽃심이 있으니, 피고, 지고, 다시 피어.
예전부터 ‘시울’이란 단어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졌던 내게 ‘꽃시울’이란 말도 퍽 인상적인 어휘 사용이었다. 시울은 활시위의 모양과 눈과 입 등의 가장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활시위의 모양과 눈시울, ‘입시울(입술)’이 같은 어원을 가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갑게 익은 햇빛이 사람의 기척 없는 빈 집의 지붕과 마당을 조청같이 숨막히게 누르고, 제 물에 겨운 봉숭아, 맨드라미의 꽃시울이 한낮의 정적 속에 자지러지는데, 닫은 방문이 무색하게 온 몸뚱이를 맨살로 드러내고 있는 신발 네 짝은, 어쩌면 굳이 숨기려 할 것도 없는 행색으로도 보였다.

한편 장가드는 소년 강모의 인상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를 보자.

“하이고오, 신랑 좀 보소. 똑 꽃잎맹이네.” 사모(紗帽)를 쓰고, 자색(紫色) 단령(團領)을 입은 신랑은 소년이었다. 몸가짐은 의젓하였지만 자그마한 체구였고, 얼굴빛은 발그레 분홍물이 돌아, 귀밑에서 볼을 타고 턱을 돌아 목으로 흘러내리는 여린 선에 보송보송 복숭아털이 그대로 느껴진다.

꽃잎 모양인 신랑, 얼굴빛이 발그레 분홍물이 돌고 귀밑에서 볼을 타고 턱을 돌아 목으로 흘러내리는 여린 선에 복숭아털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 소년 신랑은 요즘 말로 하면 ‘꽃미남’이다. ‘꽃미남’은 기생오라비와 대조된다. 대상은 비슷하지만 사회적 평가는 정반대다.

‘꽃미남’은 예쁘면서 부드럽게 생긴 그래서 여성들이 가진 아름다움의 요소를 가진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꽃미남’은 기본적으로는 꽃처럼 잘 생긴 남자의 의미에서 출발하지만 ‘여성 같다’, ‘부드럽다’ 등, 꽃에서 파생되는 부가적 의미 이외에도 전도된 미남의 가치와 그 사회적 양상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꽃미남’은 아직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이미 단어로 자리를 잡았다.

작가 최명희의 작가적 감성에서 비롯되어 찾아내거나 만들어낸 ‘꽃심, 꽃시울’ 등과 작금에 방송 연예계에서 비롯된 잠재어 ‘꽃미남’이 사용되는 장은 달라도 비슷한 출발선 위에 놓여 있는 것들이며 동시에 ‘꽃’을 단어의 구성요소로 이용한 점에서 눈길을 끈다. 꽃미남의 파급은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서 파죽지세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꽃심’, ‘꽃시울’ 등은 비록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을망정 표현하고 싶은 그 무엇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에게는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리는 단어로 살아갈 것이다.

가슴에 꽃심이 있으니, 피고, 지고, 다시 피어.

 

/문화저널 2006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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