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김영석) 박정만 시인과 최명희...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07-02-02 13:21
조회
2198

<중략>

광주사태를 겪고 난 5공초 암울하던 때, 정만은 청진동 근방의 모 출판사 편집장 일을 맡고 있었다. 봄볕이 더없이 화사한 어느날 오후. 나는 최명희(아, 그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와 그 출판사 부근의 조용한 술집에서 정만이를 불러냈다.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그랬듯이, 글러먹은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몹시 침울하고 다소간 체념적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곧잘 그렇듯이 이야기는 회고조로 변했고 취기가 오르면서는 다시 글러먹은 문학과 글러먹지 않은 문학으로 화제를 바꾸어 목청을 돋우기 시작했다. 희미한 기억들을 모아보면, 박정만은 요약컨대 시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연면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며, 그 표현은 마땅히 우리말의 가락과 뜻이 미묘하게 결합된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우리말에 대한 시적 감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글러먹은 시에 대해 개탄했던 것 같다. 이에 최명희도 동의하면서, 우리의 것을 우리 세대에 복원하고 세련시키지 않으면 우리 문학은 큰 줄기를 하나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다며 대략 전통주의적 입장을 이야기했고, 나는 이들의 말을 다소 예스럽게 표현하여 조선주의 또는 조선 혼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동의했던 것 같다.

한참 이야기가 도도할 무렵 열려진 뒷문을 내다보니 보자기만한 뜨락에 새로 돋은 여린 풀잎들 위로 화사한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나는 그런 봄볕의 정경을 보면 슬프다 못해 그만 처참해지고 만다. “처참하구나, 처참해.” 무심코 뱉은 내 말에 정만이 눈치를 챘는지, “형, 저 봄볕이 우리들 먹으라고 하늘에서 뿌리는 청산가리요, 청산가리. 저 청산가리 소주에 타서 마시고 우리도 그만 청산가리나 됩시다.” 하고 말을 받았다. 이어 우리는 “자, 청산가리 한 잔.” “청산가리 곱빼기로 또 한 잔.” 하고 외치면서 거푸 잔을 들었고, 정만이는 드디어 물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며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의 18번을 달뜬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봄날에는 꽃 안개 아름다운 꿈속에서 처음 그대를 만났네……” 그런데 낌새가 이상하여 옆을 보니 술은 입술에 대는 둥 마는 둥하던 최명희가 흰 무명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누이처럼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니 정만이는 제 식으로 잘 직조된 조선말의 영롱한 시들을 썼고, 최명희도 또한 제 식으로 조선혼을 소설에 수놓지 않았는가 싶다.

<중략>

시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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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석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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