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 ‘혼불’-6億줘도 살수 없는 감동

‘혼불’-6億줘도 살수 없는 감동

옛사람들이 사람의 한평생을 가리켜, 날 生(생) 옆에 물가 涯(애), 끝 涯(애), 벼랑 낭떠러지 涯(애) 자를 붙인것은 산다는 것이 그렇게 늘 아슬아슬한 百尺竿頭(백척간두), 백자나 되는 장대 끝에 까마득히 곤두서서 위태로이 흔들리며, 자칫 고꾸라져 떨어져 물살에 섞쓸려 내려가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생각한다.

‘혼불’은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면서도 생의 모든 대소사를 위해 격식과 법도와 순서와 절차를 마련해서 살고, 또 그 처참하고 모진 삶의 굽이굽이에 학문과 예술을 끼워넣은 한국인의 조상들의 면모를 수백폭짜리 병풍처럼 한폭한폭 펼쳐보여주고 있다.

해방이후 출생인 이 작가의 작품이 한국인의 생활사, 풍속사, 의례와 속신의 백과사전이라는 사실도 경이롭지만, 그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것은 엄숙한 관혼상제의 의식에서부터 하찮은 관습이나 풍속에도 동작 하나, 실오라기 하나의 놓임에까지 모두 유래와 이치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 정반대의 시각을 갖고 있는 독자에게도 이 작품은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감동을 준다. 사실 ‘혼불’은 어떤 민중소설 못지 않게 상민, 천민의 마디마디 맺힌 설움과 억울함을 뼈저리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최명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빛’인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가 수절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그리고 殉死(순사)를 하는 것을 아름답게 보았고, 돈을 벌어 공명첩을 산 中人(중인)이 程子冠(정자관)을 쓰고 자기집에서 양반흉내를 내 보았다해서 당장 잡아다가 덕석말이 몰매를 친 양반의 ‘서릿발같은 기상’도 우러러 보았다.

그런것을 아름답게 못보는 정도가 아니라 용서할 수조차 없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양반의 품위와 婦道(부도)에 대한 작가의 애달픈 崇慕(숭모)가 이 대하소설의 원동력의 반이다. 나머지 반은 속절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애절한 연민과 그 하찮은 인간이 시름많은 삶을 살며 이루고 남긴 것에 대한 찬탄이다.

그래서 ‘혼불’은 신부의 의상에서부터 시작되는 혼례의 모든 절차와 의례, 우리의 전통가구, 침선, 상례와 제례의 모든 절차와 법도, 풍수의 이치와 무속신앙, 조선의 관제, 직제, 행정구역, 신분제도와 노비제도, 백정의 모든 작업과정, 염료제조법, 옷감의 때와 얼룩을 빼는 갖가지 세탁법, 한약재, 세시풍속, 鳶(연)만드는 법 등등 우리 조상의 생활의 모든 면모를 지극히 상세하게 그 모든 세부명칭을 포함해서, 그 삶을 살고, 그 의식을 행했던 사람들의 심경이 손에 잡히도록 펼쳐보인다.

방물장수의 바구니에 든 온갖 신기한 물건들의 태깔과 용도는 물론 나막신 깎는 법과 그 맵시의 비밀까지 알고 있는 작가의 지식도 경탄스럽지만, 그 하나하나를 마치 손수 그것들을 정성스러이 행하며 그 자리에서 느끼고 감당했던 사람처럼 서술해내니 구구절절이 곧 판소리가락이 된다.

또 작가의 현미경적인 관찰력과 세세한 관심은 ‘쥐’를 가리키는 漢字(한자)가 50개가 넘고 그 한자가 모두 각기 다른 쥐의 종류, 모양, 짓거리를 가리킨다는 것에서부터 가물치의 등에 점이 등지느러미 양쪽으로 8개씩 있다든지, 바이올린의 줄받침이 단풍나무로 되었다든지, 예수가 인간을 심판할 도구인 ‘저리’는 갈매나무라든지 하는 것까지 알아내어 독자에게 알려준다. 그러니까 10권으로 된 이 책 한 질의 가격은 6만원이지만 그 속에 있는 모든 지식과 느낌과 감동은 6억원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최명희의 언어구사는 많은 사람이 지적한 것처럼 가히 주술적이다. 1권 서두에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의 묘사부터 마지막권 남만주의과대학 마당에 핀 고향의 꽃 묘사까지 사람의 온갖 미묘하고 절제된 감정에서부터 억장이 무너지고 피를 토하고 죽을 감정까지 너무나 선연하게 그려져있고, 사람이 절을 한번 하는데도 그 때의 상황과 하는 사람의 감정상태에 따라 이마를 낮추는 절, 허리를 숙이는 절, 어깨를 꺾는 절 등 그 무수한 차이를 절묘하게 재현해낸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시대와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루어내는 흥미진진하며 절박한 이야기와 벼랑가의 생애에서 무수한 한을 지고 산 寃魂(원혼)들의 혼불이 타고있다.

이 모든 것이 어찌 작가의 ‘역량’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랴. 최명희는 신동아에 이 소설을 연재할 때 매달 원고를 쓸 때가 되면 한가지씩 병을 앓았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 뼈를 깎고 몸을 허물고 진액을 다 바쳐서 작품을 쓰고서 작가가 바라는 대가는 단 하나. 소일삼아서라도 읽어 달라는 것이다.

문화일보 1997/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