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

그리고 최명희

최명희 씨를 생각함

최명희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 노트를 든 최명희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통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 후 서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카페였는데 고저회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이형, 요즈음 내가 한 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 원이야, 삼만 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시집 ‘은빛 호각’ (이시형/창비) 중에서

▣ 작가 최명희와 소설 <혼불>을 떠올린 아름다운 분들의 애틋한 글이에요.

(이길재)[이길재의 겨레말]가을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3-02-09 16:59
조회
392
○출처: 이데일리 2012-10-22 [이길재의 겨레말]가을

○글쓴이: 이길재/겨레말큰사전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2292726599695544&mediaCodeNo=257&OutLnkChk=Y

볏더미를 쌓아 낟가리를 하는 것으로 한 차례 {가을을} 끝내자?. 《선우휘: 사도행전》

콩밭에 올라가 보니 콩대가 보여야 {가을을} 하지. 《류원무: 봄물》

‘가을’을 만끽하고픈 단풍놀이 행락객들을 설레게 하는 계절! 그런데 ‘가을을 끝내자’, ‘가을을 하지’의 ‘가을’은 계절과는 무관해 보인다. 두 작가의 소설에 나타나는 ‘가을’은 ‘추수’와 비슷한 말로,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가을’과 ‘추수’는 ‘농작물을 거두어들인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가을’은 그 시기가 꼭 ‘가을’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에서‘추수’와 다르다. ‘볏가을’, ‘보릿가을’(북한에서 간행된 <조선말대사전>에는 ‘벼가을, 보리가을’로 실려 있음.)이라고 하지만 ‘보리 추수’라고는 할 수 없다. ‘보리’는 가을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농작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볏가을’은 ‘벼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 ‘보릿가을’은 ‘보리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벼가을을} 앞두고 농촌의 일손은 바빴다. 《김송: 김여인의 일생》

그렇게 여섯 달이먼 {보리가을까지는} 빠듯하게 대겄지라우. 《송기숙: 녹두장군》

{보릿가을을} 하여 먹을 것도 있었다. 《문순태: 타오르는 강》

요즘은 ‘콤바인’이라는 기계가 있어 ‘벼가을’과 ‘벼바심’이 한 자리에서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낫으로 벼를 베어 논바닥에 깔아 말리고, 마른 벼는 다시 한 다발씩 묶어 ‘사발가리(볏단 20개 정도를 열십자 모양으로 쌓아 놓은 더미를 이르는 전북 방언. 전남 지역에서는 ’십자가리‘라고 한다.)’를 쳐 두었다. 가을걷이가 끝나 갈 무렵 농군들은 달구지나 지게 등짐으로 볏단을 날라 마당 한 켠에 볏가리를 쌓았다. 여기까지가 ‘볏가을’이다. ‘볏가을’이 끝난 후에 ‘벼바심’을 하게 된다. ‘가을’이 끝난 후에 ‘바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을’은 ‘볏가을’이나 ‘보릿가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강 언덕으로 올라서서 동구 앞 달구지 길로 접어들었을 때 들판에는 이미 조합원들이 {밀가을을} 하고 있었다. 《권정룡: 아버지의 수기》

장 서방은 밭머리쉼도 없이 이어 {조가을에} 달라붙었다. 《리근전: 고난의 년대》

오늘 {콩가을을} 하는데 저 녀자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빗디뎠는지 넘어져서 비탈로 구부는(구르는) 걸 보았소.《김순녀: 동병상련》

‘밀가을’은 ‘밀을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 ‘조가을’은 ‘조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 ‘콩가을’은 ‘콩을 뽑거나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밀가을, 조가을, 콩가을’ 등은 아직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은 말들이다.

‘가을’은 ‘하다’와 결합하여 ‘가을하다’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 뜻은 ‘벼나 보리 등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다’이다.

묵묵히 땅을 갈아 번지고 묵묵히 씨 뿌리고 묵묵히 기음매고 묵묵히 {가을하고} 타작하고 하면 1년의 삶은 끝나가는 것이다. 《김재국: 타계의 웃음》

금빛물결 일렁이는 드넓은 논벌 여기저기에 벼 {가을하는} 사람들의 농립모와 하얀 머리 수건들이 보인다. 《조상호: 첫선물》

계절을 나타내는 ‘가을’과 추수의 의미를 갖는 ‘가을’은 서로 다른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어원이 같은 말이다. ‘가을’은 ‘끊다’ 혹은 ‘자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다’와 ‘?’이 결합한 ‘??’이 ‘??>??>?을>가을’과 같은 변화를 겪은 말이다. 계절의 ‘가을’이든 추수의 ‘가을’이든 모두 ‘끊다, 자르다’의 의미에서부터 출발한 단어이다. 따라서 ‘가을’은 그 밑바탕에 ‘추수의 계절’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가을, 가을하다’의 방언형으로 ‘가실, 가슬, 가실하다(가실허다), 가슬하다(가슬허다)’ 등이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 따라 ‘??>??>?슬>가슬>가실’과 같은 변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작년 {가실에} 감 딸 직에 한 개 냉게 놨잖이여? 《최명희: 혼불》

쎄 빠지게 일헐 눔 하나또 웂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북헐 농새 지나마자 아니겄소? 《조정래: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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