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최명희의 생가터와 최명희길, 혼불문학공원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2-16 12:45
조회
1856


키 낮은 처마가 이마를 맞대듯, 어깨를 겨누듯 잇대거나 포개진 정겨운 골목. 담장 대신 기와 능선이 이어지는 전주한옥마을. 전주시가 1999년부터 예향의 상징처럼 가꿔온 전통문화특구인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경기전과 사시사철 아이들이 뛰노는 전주천을 포함한 교동․풍남동 일대다. 인근에는 한벽당·오목대·이목대·향교·학인당·풍남문·전동성당 등 전통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고, 한민족의 삶과 우리말에 깃들인 얼의 무늬를 소설 「혼불」에 그려낸 소설가 최명희(1947∼1998)의 생가터와 그의 문학 혼이 올곧게 녹아 있는 최명희문학관이 있다. 그리고 ‘최명희길’도 있다.
그리고 끝없는 좌절과 소망의 회오리 숨결들이 점점이 고을 고을 새겨진 골목길들을 결코 놓치지 말라. 붙잡으라. 그 이야기와 삶의 흔적들을 지금 우리가 놓치면, 이제는 아무도 못 찾는다. 끝내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국토와 마을과 집안마다 흘러내리는 이 숨결과 이야기를, 갈피마다 주워 담아 품고 길러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혼불 3권』 226쪽

최명희문학관 뒷길에서 기린대로까지 이어지는 300여 미터의 길과 문학관 후문에서 생가터까지 이어지는 'ㄴ'자 형 골목이 '최명희길'이다. 생가터 표지석을 모서리에 두고, 위로 난 길의 끝에 동학혁명기념관이 있고, 옆으로 난 길의 끝에 최명희문학관이 있는 셈이다. ‘ᄂ’자로 꺾이지도 않았다면 무척 밋밋하고 서운했을 이 길이 2008년 가을을 기점으로 더 길고 넓은 곳으로 바뀌었다.

최명희길은 동완산동 투구봉길, 인후동 팽나무길, 서노송동 개나리길, 서서학동 소나무길, 동완산동 매화길, 진북동 느티나무길과 백합길, 금암동 매화길과 뽕나무길 등 전주시내 도로들이 살가운 이름으로 바뀌던 2001년, 기린로에서 전동성당에 이르는 경기전길이 태조 이성계와 얽힌 역사를 감안해 태조로로 단장 되던 그 때부터 시나브로 전주 사람들의 언저리에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은 그 곳 주민이나 행인들에 의해 자연스레 붙여진 것이 아니다. 1999년부터 간선도로는 물론 골목길까지 역사성과 특성을 담아 부르기 편하고 친근감이 있는 새 이름을 부여했던 전주시의 사업으로 탄생했다. 하나 더 서운한 것은 당초 최명희의 이름을 붙인 길이, 풍남동 동부시장에서 남천교를 잇는 꽤 긴 길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크게 줄었다는 사실. 고무줄을 늘렸다가 놓아버린 것처럼 맥없고, 아프다.

풍남동과 경원동, 그리고 화원동 … . 1980년대 초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집은 헐리고 그 터만 남아 있으며, 2000년 12월 혼불기념사업회가 전주시와 함께 그곳에 생가표지석을 세우고,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생가터 표지석이 있는 이곳을 최명희는 무척 아꼈다. 1997년 11월 8일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혼불」과 국어사전’을 주제로 강연을 열었던 최명희는 그곳을 이렇게 자랑했다.
….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이라고 하는, 지금은 경원동이라고 이름이 바뀐 그런 동네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어렸을 때 ―그 때 국민학교라고 했지요. 초등학교가 아니고― 그때 뭐 조사하는 게 많아요. 학교에서 무슨 주소 같은 거, 본적, 아버지, 어머니, 성함, 가족관계, 그럴 때 전 이상하게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 몇 번지라고 했을 때 그 어린 마음에도 화원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제 맘에 좋아서 굉장히 제가 뭔지 아름다운 동네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 화원이라고 하는 ― 꽃밭이라는 뜻이겠지만 ― 화원이라고 하는 그 음률이, 그 음색이 주는 울림이 저로 하여금 굉장히 제 마음에 화사한 꽃밭 하나를 지니고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곤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듣는 말이 그 사람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데 제가 어떤 아주 날카로운 발음의 동네에서 태어나지 않고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났다는 게 항상 저에게 그 ㅈ발음이 주는, 이상하게 편안하고 낮은 음조이면서도 이렇게 활짝 피었다기보다는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발음의 음감이 제 성격의 어떤 일면을 꼭 이루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작가의 개성이나 인격은 문체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 어휘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방식에서도 작가 나름의 진솔한 면모는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골목길은 유달리 쓸쓸하다. 단편소설 「주소」에서 서울로 갓 전근을 간 󰡐여(女)선생󰡑은 퇴근하고 자취집으로 오며 󰡐골목을 들어설 때부터 마음은 무겁게 두근거리고, 대문을 열고 내 방까지 오는 짧은 몇 발짝이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금방이라도 "이보시라요." 하는 주인댁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아 저 혼자 소스라쳤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집으로 가는 골목을 그냥 지나치면서 '두벅두벅' 걷기도 한다. 인적이 끊긴 골목에서 구두소리는 유난히 크다. 최명희는 그것을 오히려 󰡐마을이 숨을 죽이고 있는 탓󰡑이라고 했다.

단편소설 「몌별」의 '그녀'는 더 쓸쓸하고 가엽다. '내가 여기에 와 있는데요. 이렇게 당신의 방문 앞에 담벼락을 두드리며 울고 있는데요. 당신을 부르고 있는데요. 당신은 보이지 않아요. 어둠 속에 있어요. 불러도 들리지 않을 곳에서,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이 어둠 속의 골목에 서 있게 하시는가요. 나를 보아요. 내게 대답해 주어요.' 하며 담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죽인다. 몸 속에 갇힌 울음이 굽이를 치며 솟구치기도 했을 터.

서민생활 현장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묘사하는 최명희의 풍부한 언어 구사 능력은 고향 전주의 이 골목 저 골목, 깊숙한 골목쟁이까지 빠짐없이 묘사돼 있다. 대개 한벽당에서 다가봉까지 전주천을 옆구리에 낀 동네, 한옥마을과 다가동, 완산동이다.

'다가산 기슭에 엎드린 동네'에선 「혼불」의 강모와 오유끼가 산다. 강모가 남원 본가에라도 가는 날이면 오유끼는 그 골목 어귀에서 강모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갓을 쓴 전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그곳에서 잠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에서는 너풀너풀 눈송이가 내리고, 그 서늘한 불빛 아래 눈송이는 꽃잎처럼 하염없이 졌다. 너풀 너풀 내리던 눈송이들은 점점 바람을 타고 흩날리면서 길바닥에 쌓이고……. 발자국 소리에 놀란, 건너편 집의 개가 귀를 세우며 짖는 소리가 커겅, 컹, 컹, 컹, 터져 나온다. 뒤따라 몇 집에서 개가 짖는다. '오유끼'.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눈 내리는 빈 골목에 목소리가 울린다.

미완성 장편소설 「제망매가」에서는 전주천, 매곡교를 건너면 만나는 골목이 도처에서 꿈틀댄다. 노점상을 단속하는 순사들의 호각소리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달리던 아낙네들의 숨터다. 또 '아편골목'이라고도 불리는 '개골목'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붉은 녹이 슬고, 구겨지기도 한 여인숙의 양철 간판들. 최명희는 그 골목에서도 낯익은 향수를 찾아냈다. '그 골목에 들어서던 어느 날 저녁, 쑥국 끓이는 향긋하고 상큼한 냄새'가 넘어 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맛있는 상상이다.

최명희는 20여 년 간 살았던 집을 떠나면서 느낀 감상을 옮긴 단편소설 「쓰러지는 빛」(1980․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는 미궁과 같았던 완산동 골목길의 추억이 담겨 있다.
'대문을 밀고 나서면 오른쪽으로 집 울타리를 낀 골목 끝이 바로 천변이다. 골목 길이는, 천변 쪽으로는 그저 몇 걸음 되지 않았으나, 동네 안 쪽으로 가면서 세 갈래로 나뉘고, 그것들이 가다가 새끼를 쳐서 다시 몇몇 갈래가 되어, 그 골목은 들어서기만 하면 미궁처럼 헤매기 쉬웠다. 그래서 우리들의 어린 날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중략: 필자) 온 골목의 집집마다에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날만 밝으면 눈을 비비며 튀어나와 밥 때를 넘기고도 배고픈 줄을 모르고 뛰어 놀았다.'

그 어린 날, 시멘트 블록 담을 치지 않았다던 그 때, 담 역할을 했을 탱자나무 울타리는 얼마나 정겨웠을까. 휘황하게 피던 하얀 탱자꽃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달빛이 좋은 봄날에는 검은 생나무 울타리가 꽃너울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 이쯤이면 아이들이 있는 집의 추녀 끝에서 낭랑한 웃음소리도 터져 나올 법하다. 그게 골목길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도 역시 혈이 있을 것인즉, 그 혈을 찾고 다루는 일이 정신에 그리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제 인생의 맥 속에서 참다운 혈을 못 찾은 사람은 헛되이 한평생 헤맬 것이요, 엉뚱한 곳에 집착한 사람은 헛살았다 할 것이다… 만일에 정신이나 인생에 그 혈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설혹 안다 해도 못 찾고, 또 찾았대도 그 자리를 그냥 방치하여 비워둔 채 쓸모없이 버려둔다면, 이는 제 정신이나 제 인생을 눈먼 문둥이로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혼불(제3권)』

전주시는 혼불기념사업회와 함께 2000년 전주시 덕진동 선생의 묘역에 작고 아름다운 혼불문학공원을 조성했다. 최명희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주의 어느 나지막한 야산. 무덤 앞에 서면 선생의 모교인 전북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가까이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덕진연못이 있는 곳. 산책로는 크고 작은 통나무를 빽빽이 심어 걷기에 좋을 뿐 아니라 미감이 뛰어나다.

묘 바로 앞에는 선생의 고교 시절을 형상화한 부조상(채우승 작)이 있고, 묘 아래에는 반원형으로 10개의 안내석이 있다. 안도현·김병용·최기우 등 후배 작가들이 「혼불」과 선생의 어록 중에 가려 뽑아 새긴 것이다.(글씨 박원규) 평소 작가의 뜻대로 조촐하되 누구나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예쁜 공간이다. 당시 묘지를 소점(터를 잡는 일)하는 일에 관여했던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작가가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기 때문에 자손의 발복을 고려하지 않는 대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찾아와 작가를 기릴 수 있도록 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선문대 풍수학 강사인 최낙기씨도 “최선생의 무덤 터는 멀리서 보면 마치 초롱불 같다.”고 했다. 무덤은 그곳에 안장된 사람을 그대로 반영한다.

∥글: 최기우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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