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혼불」로 읽는 전주한지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2-23 15:12
조회
2760


○ 혁명적 지식 문화의 원천인 전주한지
그것은 활짝 펼치면 거의 장판지 한 장 정도의 넓이가 되지만, 접으면 가로 세로가 한 자씩이나 됨직한 상자 모양이 되는 것이었다. 종이를 여러 겹 덧발라 부(附)해서 누렇게 기름을 먹인 이 빗접은, 중심부에 손가락 한 개를 세운 높이로 네모진 테두리를 두르고, 그 네모를 또 다른 칸으로 나누어, 작은 칸 속에는 각기 빗이며 동곳·살쩍밀이 같은 것을 담아 두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빗을 때는 이 빗접을 넓게 펼치어 쓰고, 다 빗은 다음에는 다시 접어 간편하게 밀어 놓는 것인데, 혹 어디 출행할 일이 있을 때는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다회를 친 매듭 끈까지 달린 것이다. 빗접의 뚜껑에는 한복판에 색지를 접어 가위로 오린 녹색 꽃이 탐스럽고 정교하게 피어 있고, 꽃의 둘레 네 귀퉁이에는 노랑·주황·보라·남색의 매미와 잠자리들이 솜씨 있게 오려 붙여져 있었다. ∥「혼불」 5권 20∼21쪽

『동국여지승람』(1481)에 ‘전주는 한지 상품지의 산지’라고 했으며, 『여지도서』(1765)·『대동지지』(1864)도 전주의 한지가 최상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주가 한지의 주생산지였음은 조선말의 자료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구한말 러시아의 정책보고서 『한국지』(1900)에는 “한국의 제지업은 중국인을 능가하고 있다. 종이 쓰임새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산, 양산, 비를 가리는 모자, 병복, 가방을 만든다. 러시아 판지보다 질기며 견고하다. 가장 양질의 종이는 절대다수 전라도에서 제조되고 있다.”라고 적혀있다. 종이의 주생산지로서 전주의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때 발행된 『전라북도의 특산물』에 조선지(한지)를 맨 앞장에서 다루며 전주한지를 조선 최고의 종이로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1910년에는 우리나라 한지 생산의 40%를 전북에서 담당했으며, 생산 호수도 1,772호로 충북의 1,515호나 경북의 572호보다 많았다. 전주(완주)·임실·남원·순창에서 생산이 많았는데, 전주는 특히 도시를 관통하는 전주천과 완주군 소양면 소양천 주변에서 한지를 생산했다. 전주는 또한, 전북에서 생산된 한지의 수집과 거래의 중심지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전주한지가 최고의 명성을 잃지 않은 이유는 한지가 인류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자연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전주는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종이의 질을 좌우하는 물이 좋았다. 철분이 함유돼 있지 않은 전주천 물은 한지 제조에 맞춤이었다. 거기에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작업을 해나갔던 한지 장인들이 한지의 자연친화적 성질을 잘 드러내 주었다.

○ 먹장삼의 스님이 종이꽃물 들이는……

전주천이 감싸고도는 전주한옥마을에서 나고 자란 작가 최명희(1947∼1998). 그의 소설 「혼불」에는 한민족 핏줄에 흐르는 낯익은 민속이 담겨 있다. 엄숙한 관혼상제의 의식부터 일상적인 풍속이나 관습의 동작 하나, 실오라기 하나의 놓임에 이르기까지 그 유래와 이치와 의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혼례의 절차와 의례, 상례와 제례의 절차와 법도, 풍수의 이치와 무속신앙, 전통가구와 침선, 조선의 관제, 직제, 행정구역, 신분제도와 노비제도, 염료 제조법, 옷감의 때와 얼룩을 빼는 갖가지 세탁법 등 한국인의 생활 면모도 지극히 정갈하게 담겼다.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과 빗솔, 빗치개 등을 넣어 두는 종이상자 빗접의 모양과 쓰임새도 마찬가지다. 「혼불」의 이기채는 매일 아침 뚜껑이 단정하게 덮인 빗접을 펼쳐 놓고 넓은 종이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고는 행여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한국인의 생활사, 풍속사, 의례와 속신의 백과사전이며,󰡐우리 문화전승의 전범(典範)이라고 일컫는 소설 「혼불」.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루고 싶은 것일까. 그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 있는 넋의 비밀과 그 비밀들이 서로 필연적인 관계로 작용하며 어우러지는 현상을 언어의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해 섬세하게 복원하고자 했다. 가장 앞서는 것은 ‘느낌’이다.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 자료들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자료와 사물들을 어떻게 정서화하고 감각화해서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생생하게 느끼며 만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원을 통해 참된 우리 삶의 모습과 우리 정신의 원형질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것이 작가가 「혼불」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었다.

그래서 「혼불」에는 환한 가을 녘에 종이꽃 휘날리며 가던, 환장하게 아름답고 구슬픈 상여와 상여소리도 가슴 절절히 새겨 있다. 잊고 지내온 아득한 일들.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나서던 나들이에서 마주친 시골길, 풀 한포기, 밟던 흙의 질감 등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 「혼불」을 쓰게 했고, 외할머니의 궁체 두루마리 편지와 할아버지의 고색창연한 문집 등을 접하며 종이와 글씨에 대한 남다른 친화력을 가지게 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종이꽃 그늘>을 작은 제목으로 시작하는 「혼불」 제9권은 연꽃등을 만드는 호성암 암주(庵主)스님 도환(道環)의 종이꽃 만드는 과정을 서정시처럼 잔잔하게 그렸다. 영산백(映山白) 흰 꽃이 투명한 모시빛으로 소담스럽게 핀 암자의 뒷마당 그늘진 곳에서, 놋대야만한 단지 뚜껑에다 연분홍 물감을 풀어놓고, 한 장 한 장 백지를 담가 흔들며 물을 들이고 있던 도환은, 인기척을 듣고 문득 고개를 돌린다. 강모다. 주르르 분홍물이 떨어지는 한지를 양손으로 맞잡아 올리면서 도환이 반갑게 일어선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바쁘시구만요.”
강호는 물들여 널어놓은 색지를 가리켜 눈짓한다.
“그늘에 말려야 빛이 안 바래거든요.”
금방 건져낸 연분홍 한지를 널판자에 펼치는 도환의 말에 강호가 웃는다.
“이상하게도 안 변해야 할 것들은 꼭 그늘에서 말리지요?”
“그늘……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관목(棺木)도 그렇고, 거문고 만들 오동나무도 그렇고, 집 지을 서까래 기둥목도 그렇고. 이런 종이 한 장까지도.”
“그것뿐입니까? 아, 저 판소리에서도, 또랑또랑한 목은 별로 치고 소리에 그늘이 있어야 심금을 울리는 깊은 맛이 오묘하게 우러난다지 않아요?”
“세상 이치가 묘할 따름입니다.”
강호는 저 혼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하던 일이라서 내처 해야겠는데 어쩌나. 산책이라도 잠깐 하시겠습니까? 신록이 좋아 이리저리 거닐 만하실 겝니다만.”
도환이 미안한 낯빛을 짓는다.
“아니요. 구경은 여기서 하지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데요. 먹장삼의 스님이 꽃물 들이는 것도 보기에 좋습니다.”
초파일 관등(觀燈)에 수수백 등 수수천 등 공중에 매달아 밝힐 등불을 넉넉히 쓰려면, 지금부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연꽃등을 만들어야 하리라.
부처님은 그 많은 중생의 소원들을 다 어찌하시랴는고.
고대광실 치솟은 대갓집의 처마끝에 매달린 소원부터, 시궁창 속에서 가슴이 벌어지는 나무토막의 진액이 토해 내는 소원에 이르기까지. 사바 예토의 진흙밭에 연꽃같이 피는 소원의 등불들을 부처님은 일일이 다 살피실 수 있을까.
아니면 이처럼 손끝 밝은 스님의 정성을 빌려야만 무명(無明)의 중생들 소원은 부처님 곁에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일까.
도환의 종이꽃 만드는 솜씨는 인근이 모두 알고 탄복하는 바였다.
꽃이라면 계절 따라 산천에서 저절로 피었다 지는 것이 으뜸이련만, 종이로 만든 지화(紙花)에는 생화로도 못 당할 인간의 지극함이 깃들어있어, 불당에서는 부처님께 온 마음의 향기를 바치는 정성이 되고, 굿당에서는 원혼의 넋을 달래며 신(神)을 울리는 해원이 된다. 그리고 인간사의 큰일인 혼인 때는 초례청에 잔치꽃으로 쓰이고, 죽으면 상여에 색색깔로 물들인 종이꽃을 덮어서 마지막 가는 길의 서러움을 휘황하게 치장하였다. 그리고 이 꽃보다 더 고운 내세를 받으라고 빌어 주었으니, 사람의 심정 담은 것으로 이만한 지물(持物)이 다시 있을까.
“절에서는 지화를 쌀·과일·차·등·향과 더불어 여섯 가지 지극한 공양으로 보아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도환이 말했다.
그러나 이 종이꽃은 아무나 만들 수가 없었다.
꽃일이 까다로운 때문이었다.
도환 스님은 상좌 때부터 배운 연봉과 연꽃, 설중화, 오색등화, 불봉화 같은 꽃들을 생화보다 곱고도 섬세 선연하게 지어내는지라, 늘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였다.
특히나 사월 초파일이면 물오르는 수목들의 엽엽(葉葉) 푸른 잎사귀 그늘 속에서, 금방이라도 벙글어져 피어날 듯 탐스럽고 어여쁜 연꽃 등이 호성암 앞뒤뜰은 물론이요, 노적봉 중턱을 수놓으며 밝혀질 때, 유한한 인생의 발원이 무한하신 법력(法力)에 황홀하게 이르는 것을 실감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는 청암부인 상을 당하였을 때, 여러 밤을 새우며 꽃상여 꾸밀 연꽃과 연봉을 정성껏 만들어 부조하였다. ∥「혼불」 9권 11∼14쪽

작가 최명희는 도환의 손마저 곱게 표현했다. 󰡐꽃 만드는 손이어서 그러한가.󰡑 지화에 꽃물을 드리는 도환과 호성암의 풍경이 액자 속 빛바랜 수묵화처럼 아스라하다.

나나니벌이 비파줄에 날개를 비비며 노는 북방천왕전에도 연등이 드리워져 있다.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곱게 물들인 한지를 접어서, 실금까지 조롬조롬 잡은 꽃잎이 비늘인 양 낱낱이 층을 이루며 박히어, 동그랗고 소담스러운 숭어리로 피어오른 연꽃 등은 진분홍·연분홍·병아리색, 선연도 하다. ∥「혼불」 9권 102쪽

∥글: 최기우 (극작가, 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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