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문학관의 선물(글과 영상)

[글]「제망매가」는 최명희의 장편소설입니다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2-01-07 15:51
조회
888
「제망매가」는 소설가 최명희(1947∼1998)가 「혼불」 제1부와 제2부를 쓰는 과정에서 집필했다가 잡지의 폐간으로 마무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미완의 장편소설이다.



1983년 『혼불』(동아일보사)이 간행된 이후 『신동아』로 「혼불」 제2부가 연재되기 시작한 1988년 9월까지 작가는 5년여의 공백이 있었다. 「제망매가」는 그 공백의 한 중앙인 1985년 9월부터 1986년 4월까지 월간지 『전통문화』를 통해 총 8회 연재(총 분량: 635.2장)되었다. 한 여성 명창(안향련)의 가련한 죽음에 대한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로, 연재 당시 큰 호응을 얻었지만, 연재가 중단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잊힌 작품이 됐다. 생전(生前)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 요소가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과거를 산책하는 듯한 환상성을 유지하고 있는 소설이다.

○ 전주·완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혼불」 1부는 남원시 사매면과 전주시를 주요배경으로 하지만, 「제망매가」의 무대는 전주시와 완주군을 주요배경으로, 특히 전주천 일대(한벽루부터 다가공원까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한, 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 민요, 굿 등 다양한 민속적 요소가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혼불」은 무속사상과 주역사상, 불교사상 등 전통적 의식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제시된다. 특히 굿의 현장을 세밀하게 재현해 놓는다든지 무당의 독경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든지 야광귀나 조왕신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는 것 등은 이 작품에서 출발한다.

 
“전주 옛적 이름은 완산(完山)인디, 그때는 시(市)라고 안허고 부성(府城)이라고 그맀지. 본디 이 전주 형상을 일러서 옥경청람(玉京晴嵐)․만경창파(萬頃蒼波)․행주지형(行舟之形)이라고 그맀거든. 화창허게 개인 날으 아른아른헌 아지랑이 속으서 만경창파 푸른 물결로 배를 띄워 떠나가는 형국으 지세(地勢)라는 말이다. 그중에서 유독 여그 사람들이 애끼고 사랑허는 경치가 야닯인디, 그중으 하나가 이 한별당 풍광 아니냐. 저어 머리쪽으로 흘러와 저어 서쪽 다가산(多佳山) 기슭으로 굽이치는, 이 남천(南川), 서천(西川) 냇물 줄기를 은하수(銀河水)라고 허니라. 부남(府南), 부서(府西)를 적시는 이 은하수가 첫새복 맑은 안개로 그윽허게 잠긴 기운이 참말로 좋지. 그 풍광을 한벽청연(寒碧晴烟), 그런다.” ∥『전통문화』 1986년 2월호 <연재 제망매가>



전주(全州)서부터 사십 리 길, 그다지 넓은 들판도 없고, 그렇다고 밤 길 무서운 재〔峙〕도 없이, 그저 나즉나즉 삼테기처럼 소붓하게 엎드린 야산(野山)들을 동무 삼아 걸어오다 보면, 무리무리 복숭아밭 과수원들이 솔숲보다 많은데, 산과 산 사이로 치맛자락 펼쳐놓은 만큼씩의 논들이 있고, 흙이 좋아 그런지 유달리 맛이 있다는 고구마밭이 이랑이랑 보이는 이 애통이골에서, 그래도 남다르게 행세하고 사는 집이라면 단 하나 그 집뿐이지 않은가. ∥『전통문화』 1985년 12월호 <연재 제망매가>

또한, 전주천 양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지명, 인물, 풍속, 생활사 등 인문지리지로서 정보가 가득하다. 남부시장, 완산칠봉, 한별당 아래 각시바우, 좁은목, 만마관, 남천, 서천, 초록바우, 솔밭점쟁이, 무랑물, 수도골, 용머리고개, 개골목, 매곡교, 미전교, 소금전다리, 연죽교, 설대전다리, 경기전, 중바위, 슬치, 은석골, 이서 애통이 등 많은 지명이 등장하며, 해당 지명에 관한 유래나 설화가 뒤따르거나 또는 풍경 묘사가 상세하다.

인물에 대한 고증도 풍부하다. 명필 창암 이삼만, 한벽루를 지은 월당 최담, 추사 김정희와 창암과의 만남 등이 그렇다. 특히 창암 이삼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매우 유연하다. 창암의 서체를 흔히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라고 하는데, 이면에는 그만큼 창암 글씨의 자유분방함을 담고 있다.

실존 인물도 많다. 봉련이의 소리스승이며 늙고, 병들고, 아편중독자인 성산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부시장 천변 자갈밭에 포장치고 약을 팔던 <보명수 약장사 창극단>은 70년대 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광경이며, 소설에 나오는 창극단 송우석 단장도 실제 인물이다. 이렇듯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이 있거나, 최소한 모티브를 끌어낸 실존 인물이 많아서 당대 특정 소리꾼의 구술생애사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신귀동, 신귀득, 신귀녀 가계도 마찬가지다.

○ 판소리 지식은 전문가 수준

「제망매가」도 연재물이란 특성이 있어 토픽 단위 진행 방식은 「혼불」과 다르지 않다. 「혼불」과 「제망매가」의 변별점은 인물의 성격에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하나같이 소리광대 아니면 당골네로 하층계급에 속한다. 이는 「혼불」 1부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지만, 2~5부의 서사 진행과는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박사 김병용 씨는 “「제망매가」는 판소리와 춤, 무가와 무속신앙, 1960년대 전주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문학과 민속, 음악과 춤, 지역학과 문화인류학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서 ‘「혼불」 1부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추후 집필하게 될 2~5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쓴 일종의 보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작품 속 봉련의 생부 임호근이 ‘성짜나 받은 집안 내림’이라고 하지만, 형편없이 몰락한 가계에 아편 중독으로 하세(下世)했고, 이 서사 공간 내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토호 안재갑의 신분도 사실 보잘 것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날로 성산옥은 봉련이의 선생님이 되었다.

“너 사람의 목이 멫 가지 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첫날, 차일을 걷어버린 빈 무대 뒤 자갈밭에 앉아 성산옥은 봉련이에게 물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캄캄해지고, 창극은 끝난 지 오래인 시각. 북적이던 사람들도 이리저리 모두 흩어져 어디론가 다들 돌아갔는데, 검푸른 하늘에는 낮에 없던 별 몇 개가 돋아났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봉련이를 보고

성산옥은

“마흔 가지가 넘는다.”

고 하였다.

생목․속목․겉목․푸는목․감는목․찍는목․떼는목․마는목․미는목․방울목․떡목․노랑목․마른목․굳은목․끊는목․엮는목․다는목․깎는목․눅은목․된목․짜는목․찌른목․파는목․홑는목․넓은목․둥근목․짧은목․긴목․느린목․조으는목․너는목․줍는목․튀는목․뽑스린목․군목․엎는목․젖힌목….

성산옥이 이르는 말에 속으로 놀라 문득 고개를 든 봉련의 눈 속으로, 잠깐 사이에 수 없이 돋아난 별들의 무리가 쏟아져 들어 왔다.

그때 문득 성산옥은 말했다.

“소리란 허망헌 것이니라.”

그러더니 그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에 기다리는 봉련의 귀에 차가운 밤 냇물 소리가 들렸다.

∥『전통문화』 1986년 2월호 <연재 제망매가>

최명희의 판소리에 관한 지식은 가히 전문적 수준에 근접해 있다. 이 작품에서 소개되고 설명되는 소리꾼들은 당대 최고의 가객들이다. 비가비 권삼득을 비롯해 김채만, 이날치, 송만갑, 김창환, 김정문 등 특히 고종 후기에서 일제강점기의 1930년대까지 활동한 이른바 5명창 시대의 인물에 관해 풍부한 일화를 풀어 놓는다. 뿐만아니라 봉련이가 늙은 소리꾼 성산옥으로부터 본격적인 판소리를 배우는 대목에서는 40가지가 넘는다는 목구성에서 평조, 우조, 계면조 등 창조(唱調)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비유를 들며 설명한다. 게다가 실제 판소리 사설이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대부분 다섯 바탕 중 주요 눈대목이라고 할 만한 장면들이다.

○ 연재를 시작하면 쓴 작가의 글
 

그 놀이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국민학교 때, 아이들은 마치 강강술래를 하듯이 둥그렇게 손을 잡고 맴을 돌면서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신명나게 노래를 불렀는데,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가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가기도 하고,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이 맺히기도 하는 아이들의 동그라미는 어지럽게 한 덩어리가 되어 운동장을 돌았다. 그것은 평화롭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선생님은 단칼을 내리치듯 날카롭게 호루라기를 불며 ‘둘!’이라고 소리쳤다. 혹은 ‘다섯’이라고. 순식간에 평화는 유리 조각이 되어버리고 아이들은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지르며 숫자를 맞추러 뛰었다. 한 아이는 제 옆 아이의 손을 움켜쥐었으나 다른 아이가 쏜살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놓치기도 하고, 한 아이는 이미 짝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가 모질게 밀쳐지기도 하였다. 밀려난 아이는 무참하게 운동장 한쪽에 버려졌다.

버려진 아이를 두고 다시 노래에 맞추어 맴을 도는 박자는 이제 불안하고 절박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는 언제 이 동그라미의 복판을 느닷없이 찢을는지 알 수 없었고, 그때 떨어지는 명령의 숫자는 또 몇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숫자를 맞추었을 때도 누가 달려와 짝을 깰까 봐 두려웠지만, 짝을 맞추려 할 때도 내 자리는 없을 것만 같아서 더욱 두려웠다. 금방까지도 손을 잡고 노래 부르던 친구가, 안타깝게 끼어드는 손을 뿌리쳐 털어내는 매몰찬 기운, 그리고 짝을 맞춘 아이들끼리 화려하게 뭉치던 경험은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쩌다가 번번이 숫자를 놓치고 그냥 팽개쳐졌을 때, 햇빛이 쏟아지는 운동장은 얼마나 적막하고 서러운 것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제망매가(祭亡妹歌)’의 한 여인이 바라본 쓰라린 이승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의 한 세상을 이야기로 쓰려 하면서 진심으로 염려가 되는 것은, 나 또한 지금까지 그를 무참하게 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용렬하게도 다시 한 번 그를 떠밀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 ‘문화(文化)’의 거대한 덩어리 바깥에서 호루라기 소리에 쫓기며 그가 홀로 처절하게 치렀던 고통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할 뿐이다. 아무래도 ‘생명’은 ‘문화’와 숙명적으로 싸울 수밖에는 없는 것인가 물어보면서. ∥최명희 <작가의 말> 전문. 『전통문화』 1985년 7·8월호 123쪽

∥글: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관장), 김근혜(동화작가·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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