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심을 지닌 땅

언론에 비친

[전북포스트 20220426][제5회 혼불의 메아리]수상작품 대상(강선주)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2-04-26 17:29
조회
1562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강선주(48·경기도 김포시)

○ 글을 시작하며

볕이 따뜻했던 3년 전의 봄날, 가족들과 함께 남원을 여행한 적이 있다. 나는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아이들의 교육을 목적 삼아 전국에 있는 수많은 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곤 하는데, 남원 광한루에서의 밤 정취를 만끽한 후 이튿날 우리는 혼불문학관으로 향했다.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 있는 혼불의 성지에 이르러 산과 물이 어우러진 한적한 곳에 있는 문학관을 마주했다. 유난히도 푸른 하늘 아래로 쏟아지던 따스한 햇볕과 만남 속에서 마치 사진 찍히듯 눈에 들어오던 정갈한 한옥 건물과 산책로의 소박한 돌다리, 정렬된 솟대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강렬하다.

하늘의 명(命)을 깨달을 즈음의 나이에 하늘의 부름을 받아 영면한 작가의 넓고 깊은 문학 세계를 감히 다 헤아리지는 못할지라도 문학관 처마 밑에서 잠시나마 그녀의 호흡을 느끼고자 서 있었던 나를 추억한다.

대학생 시절이었던 1990년대 중반, 작가가 쓴 글을 접한 바 있다. “고향 땅의 모국어에 의지하여 문장 하나를 세우고, 그 문장 하나에 의지하여 한 세계를 세워보려고 한다.”라고 말하던 그녀는 무려 원고지 1만 2천 장 분량에 그녀의 영혼을 쏟아부었다. 결국, 미완의 아쉬운 발자취일지언정 그녀는 소멸하지 않는 ‘혼불’이 되어 세기를 달리해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을 여전히 뜨겁게 달구고 있다. 비록 그녀의 소매를 붙잡고 놓아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이별을 해야 했으나, 그녀는 인사유명(人死留名)의 본보기가 되어 지금도 글을 통해 우리 곁에서 한결같이 숨 쉬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 궁금했다. 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을 가진 허태연 작가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혼불 정신을 재현했을까 자못 기대되었다. 책 표지 뒷면에는 “스페인으로 진짜 가족을 찾아 나선 한 남자의 플라멩코 정복기”라는 설명과 더불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 풍경에서 가장 필요한 물음을 반추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덧붙여져 있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에게는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플라멩코’는 스페인 집시 공동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노래와 춤, 음악이 융합된 춤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가 고루한 탓인지 플라멩코를 추는 ‘남자’는 아직까지 낯설다. 정열적인 색상과 화려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은 요염한 여인이 추는 플라멩코가 익숙한 나는 사실 ‘남자가 추는 플라멩코’를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심사위원들 전원에게 골고루 지지를 받았다는 이 작품에 ‘코로나 시국에 대한 면밀한 반응과 가족에 대한 위로’라는 내용적 호평과 ‘작품의 가독성’, ‘스피디한 전개’ 등의 구성적 장점이 어떻게 발현이 됐는지 궁금해 조바심이 났다. 시대를 반영하되 유의미한 깨달음을 줄 만한 감동 있는 주제가 과연 어떠한 형식의 언어로 조립되고 조작될는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67세의 은퇴한 굴착기 기사 남훈은 참으로 고집스럽기 그지없다. 자존심 강하며 가부장적이고, 이 땅의 소외된 아버지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일종의 세대 차이 때문일지 모르겠다. 한 세대 위의 정형화된 군상에 닫혀 있던 마음을 열기에는 두터워진 나의 편견의 더께가 짓누르는 무거움이 상당하여 쉽지만은 않다. 심지어 가족끼리의 소통에도 서툴며 일방적이고 무뚝뚝한 노년의 남자 주인공의 대화로 시작하는 이 소설을 읽은 때는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어 원활한 소통이 불가능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3년째 막 접어든 겨울이었다.

이 소설에는 뼈대를 이루는 몇 가지 모티브가 있다. 남훈의 삶의 원동력인 ‘굴착기’, 그가 이십여 년 전부터 간직해온 ‘청년일지’, 가족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 그것이다. 주인공 남훈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코로나 검사’와 ‘백신 접종’, ‘마스크’가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린 일상이다.

주인공인 남훈이 위로의 음악인 클래식을 들으며 죽기 전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를 기록한 ‘청년일지’는 ‘현재완료 시제’의 계속적 용법이 적용되어 그의 삶을 증언하는 가시적 기록물이다. 과제 1-남보다 먼저 화내지 않기, 과제 2-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과제 3-외국어 배우고 해외 여행하기, 과제 4-건강한 체력 기르기, 과제 5-죽은 다음에 어디에 묻힐지 결정해둘 것, 과제 6-자서전 쓰기, 과제 7-보연(딸)을 만나 사과하기, 과제 8-한 달에 한 번은 꼭 보연을 볼 것 등 자신에게 가장 우선시될 만한 과업들을 하나둘 계획하고 기록하며 실행해가는 남훈의 인생은 계속 진화 중인 듯하다.

은퇴 후,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는 민머리 늙은이 남훈은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둘러보고 미래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매일의 다짐만으로 끝내는 24시간의 허무한 삶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매우 호기롭기까지 하다. 인생의 후반전, 자신이 원하는 삶의 길을 찾기 위한 출발점이 수많은 장서가 꽂힌 도서관 서가라니…. ‘마음의 거리가 먼 사람과 가까운 사람을 나눠 말하는 특유의 문법’ 체계를 갖춘 스페인어의 매력에 이끌린 남훈은 꿈을 향한 첫걸음을 언어 공부에 내디딘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편하게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을 수용하여 도전을 시도하는 주인공은 매우 진취적인 사나이다. 굳이 ‘어떤 언어 형식을 배운다는 건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는 스페인어 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영역을 공부하는 것에 도전하는 남훈은 충분히 용기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라 했던가. 남훈은 ‘춤이라도 출 수 있게 편안한 옷’을 마련하겠노라는 재단사의 배려를 기억하며 스페인어 공부에서 더 나아가 ‘플라멩코’에 도전한다. 펜데믹의 종식과 함께 그가 서 있을 스페인의 광장, 그는 그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했을 터이다. 하지만 굴착기에 26년간 앉아만 있다가 꿈의 실현을 위해 이제야 허리를 펴고 선 남훈은 ‘후들거리는 근육’을 지닌 자신의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스텝의 기본 동작인 ‘사파테이도(zapateado)’를 익히고, 발뒤꿈치로 바닥을 차는 ‘타곤(tagon)’ 동작을 익히며 그는 종아리와 발바닥이 당기는 고통을 느낀다. 이 또한 그가 선택한 새로운 세계와 마주한 순간의 낯선 긴장이며, 이는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익숙해질 그의 운명일 게다. 결국 그의 몸에 걸쳐진 ‘땀방울로 적셔진 묵직한 의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의 전신을 휘감은 희열을 가늠하고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문을 열고 나와 그동안 의식하지 못한 주변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것들과 부대끼는 중에 자신의 무감각했던 세포들이 소유한 생명력을 감지한다. 그의 굴착기를 사려던 한 청년이 듣던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빈 깍지 같은 몸뚱이 속에 있는 불덩이’를 발견하였고, 자신이 굴착기를 관리하며 까다롭게 군 이유가 ‘뭐에든, 누구한테든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가 홧김에 끼적였던 “포기하고 싶거든 포기해라. 포기할까 말까 고민이 된다면 그런 건 이미 글러먹은 거야.”라는 문장이 주는 울림을 스스로 되새기며, 그가 제 나름 지켜온 단단하고 견고했던 소신을 확인하면서도 그가 지나쳐온 과거의 회한도 받아들일 줄 아는 넉넉하고 여유가 생긴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곤란한 처지에 처한 늙다리 청년의 부탁을 들어주는 그는 “나도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은 아니야.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어.”라며 그의 뱃속을 뜨겁게 하는 자존감의 보물도 찾아낸다.

더 나아가 자신이 쌓아놓은 성벽을 조금씩 허물자 드러나는 그의 로맨틱한 본성은 심지어 꽉 막히고 고집스러워 보이던 지금까지의 모습을 잊게 할 만큼 간질간질하다. 미리 예약한 식당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힘들었을 아내와 함께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파코 데 루치아의 음악을 들으며, 생소하지만 위로의 의미를 담은 요리를 함께 나누는 그는 이미 훌륭한 로맨티스트이다. 게다가 “¡ Mi querida esposa!(나의 사랑스러운 아내여!)”, 아내를 향한 그의 고백은 마치 파에야, 하몽, 감바스의 서로 다른 식감과 풍미가 한데 어우러져 자아내는 열정적인 찬사로 들려 그의 아내가 부럽기까지 하다. 브라보!

시인 백창우의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정해진 길로만 가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따듯한 위로의 노래이다. 모든 길이 길이 될 수 있음을, 그 길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별이 반짝임을, 발밑에는 모든 방향으로 길이 나 있음을 알려주며 두려워하지 말란다. 그 길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길은 기다렸다는 듯이 길을 열어줄 것이며,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곧 인생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는 가슴 뜨거워지는 위안이 된다. 은퇴한 주인공 남훈의 길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어 활기를 띤다. 나는 그의 길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 플라멩코, 삶의 부싯돌이 되다!

주인공이 잡념을 없애려고 찾아간 플라멩코 교습소에서 흘러나오는 ‘Soy Gitano(나의 집시)’를 부른 가수 카마론 테 라 이슬라의 음색은 거칠고 짙다. 마치 스무 해 전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혼과 재혼을 하며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온 남훈의 삶이 한풀이하듯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모래알처럼 성근 그의 과거와 안정적이면서도 불안한 현재,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미래로 이어지는 스트레스는 그에게 119를 동반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한다. 어쩌면 그의 인생 지표와도 같았던 ‘청년일지’는 그동안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심리적 족쇄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이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을 빌려 쓰면서, 아비로서 전처 소생의 딸 소식을 궁금해하던 남훈은 혈육지정(血肉之情의) 복된 소임과 현재의 가족에게 감추어야 할 비밀이 공존하는 뫼비우스띠 위에서 홀로 고민하고 가슴 졸이며 외롭게 서성이면서 살아왔던 것일까.

잠시나마 병원에 입원해 청년일지의 올무에서 벗어난 그는 ‘절대 안정,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의 호사를 누리며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자유의 선물 상자는 그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스페인어 강의와 플라멩코 영상으로 채워진다. 환자로 있으면서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그의 처지가 부러운 순간이다.

만약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을 시침과 분침, 심지어 초침의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숨 가쁘게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 잠시나마 책임과 의무가 아닌 자유와 유희를 선택할 여유가 생긴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잠시 영어 문법인 가정법 ‘if~’의 시간에 나를 대입시켜 보았다. 여행을 가기 전부터 일정에 맞춰 준비하고 계획하다가 에너지를 소진하고, 정작 여행을 일처럼 하느라 충전은커녕 돌아와서 지치고 마는 나의 기질을 원망해 보았다.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종종거리는 나에게서 해방되고 싶다는 열망은 간절하면서도 직시한 현실의 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나를 질책해 보았다. 삶의 짐을 조금만 내려놓더라도 스트레스 물질인 코르티솔이 줄어들어 면역 기능이 약화되거나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고, 뇌에서 마음껏 분비되는 세로토닌과 도파민을 윤활유 삼아서 주어진 시간들을 여유 있고 능률적으로 채워갈 수 있으련만. 안타까운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퇴 후에 외부의 압력이나 제어가 없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주인공 남훈은 행복한 사람이다. 특히 그가 건강한 노년을 위해 선택한 플라멩코는 낯설지만 흥미진진한 설렘을 유발함으로써 완고하고 경직된 일상을 벗어던지는 참 자유를 맛보게 하는 ‘부싯돌’이 된다. 그가 무릎에 물이 찰 정도로 열정적으로 배운 플라멩코는 칸테(cante)-노래, 바일레(baile)-춤, 토케(toque)-음악 연주가 융합된 종합예술이다. 인간의 슬픔, 기쁨, 비통함, 환희, 공포 등과 같은 모든 감정과 심리 상태를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노래, 열정과 구애의 춤, 기타 연주 및 그 외 캐스터네츠나 박수와 발 구르기 등의 다른 악기를 사용하여 창조해내는 감성이 풍부한 장르라는 점에서 녹록지 않은 주인공의 인생을 관통하는 다양한 정서를 온몸으로 표현하기에 플라멩코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싶다. 그래서 26년 전의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불쌍한 한 아비의 소망을 늦더라도 더 늦기 전에 실행하려는 남훈의 황혼기는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며 용기를 내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과거에 매어 포기하기보다는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한 다짐을 사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의지는 ‘부엘타(vuelta)’, 즉 플라멩코의 턴(turn) 동작의 감행으로 이어진다. 결국, 현재를 누리고자 시작한 유희는 미래 미지(味知)의 유희까지도 담보하는 확장성을 지니며, 그의 인생은 끊임없이 ‘현재완료’ 시제 속에서 경험, 완료, 계속, 진행의 역동적인 불꽃으로 피어오른다.

○ 내려올 수 없는 자전거… 선택과 책임 사이!

굴착기 기사로 살아온 남훈의 삶은 어린 딸 보연이 존재하던 이혼 전의 과거와 재혼한 아내와 딸 선아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 그나마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비밀을 속 시원히 털어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채 은퇴한 그가 선택한 플라멩코가 그의 삶의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하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플라멩코를 춰야 하는 ‘책임’의 운명 앞에서 그는 위태롭다. 게다가 이제는 홀로 서툴게 시작한 독무에서 벗어나 모르는 이와 함께 춤을 맞춰야 하는 낯설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순간에 이른 것처럼 전처의 소생인 딸 보연을 만나 오랜만에 그녀를 대면하는 남훈이 안쓰럽기도 하다.

몸을 아프게 하는, ‘비명보다 뾰족한 침묵’과 ‘앙칼진 말투’, ‘째려보는 눈빛’을 감내하며 그저 “내가 미안하다. 오늘에서야 너를 찾아서”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죄인의 심정인 그의 머릿속은 이미 안개로 가득 채워지고, 심장은 천둥소리로 가득해진다. 거대한 삼지창이 맞부딪치듯 낚싯바늘처럼 뾰족한 딸과의 대화는 남훈으로 하여금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래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비겁한 회피로의 유혹을 마주하게 하지만, 이미 ‘내려올 수 없는 자전거’에 올라탄 후이므로 그는 종착역에 다다를 때야 멈추는 롤러코스터를 탄 심정으로 심란함을 견뎌야 했다.

‘가족관계증명서’라는 종이는 한 인생과 다른 인생들의 관계를 드러내고 그 안에서 고유한 가치와 독자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기에 그 무게를 차마 가늠할 길 없다. 비록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 위에 새겨진 사람들 저마다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나 외의 존재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위력을 휘두를 수 없으며,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때로는 보호할 의무와 책임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임에도 가족일 수 없었던 아버지와 딸은 서먹하고 어색하며 거리를 둔 채 만나야 했다.

중년이 된 딸 보연은 자신이 고등학생 때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함께 나누었던 ‘돈가스’를 현재로 소환해낸다. 하지만, ‘자르다 만 고깃덩이가 식어 빠진 소스와 엉겨 지저분한 상태’가 되어버린 지금의 ‘돈가스’는 이미 이전의 것과의 공통점을 상실한 다른 세계의 어색하고 건조한 파편들이었다.

누군가의 보호와 요구가 고팠던 지난 어린 시절에 이미 상실을 맛본 딸 보연은 그동안 끝까지 사랑해주는 남자를 경험하지 못해 자존감 없이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못하며 살아왔노라고 아버지에게 고백하며 ‘지긋지긋하게 많은 자유가 주어진 지금의 삶’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 ‘버려둔 자식을 만난다는 건, 늙은이의 호기로 덤벼들 일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남훈도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던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인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의 단추가 잘못 채워졌을 때 겪어야 할 황망함은 후회와 원망, 자책으로 귀결되곤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게, 최상의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에 일면 일리가 있다. 제아무리 노력을 했다고 자부할지라도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수나 실패가 있을 수 있고, 성공적인 결과를 보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각자가 좋아하는 파에야는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취향을 강요할 수도 없고, 모든 이가 만족하는 최상의 결과를 만나리라는 보장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날카로운 보연의 반응도 견뎌내야 하는 이유는 뒤늦게 딸을 찾는 선택을 한 아비로서 속죄해야 하는 책임감 때문이며, 이미 내려올 수 없는 자전거에 올라탄 그는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했다.

남훈은 딸 보연을 만나기까지 가슴속에 꽁꽁 숨겨놓은 비밀 때문에 혼자서 전전긍긍해야 했었는데, 자신의 죄책감과 불안증을 조금이나마 덜어준 젊은 사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답하고자 요리를 하기로 계획한다. 그는 그렇게 타인에게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이다. 비록 요리의 맛이, 노력의 결과가 성에 차지 않더라도 거기에 담긴 진정성이 보일 때 타인들도 진심으로 이해하고 수긍하며 인정해준다는 믿음을 가진 남훈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 혼불,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혼불’은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으로서 생(生)을 치열하게 달군 열정의 최후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남훈의 혼불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타는 중이다. 현재 진행형의 삶의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그는 과거의 우여곡절 가정사와 화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극복하면서, 사랑의 힘으로 아픔을 청산하고 긍정적으로 정리한다. 현재의 삶에서는 성실과 책임을 다하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절실한 땅의 기초를 정직하게 다져주는 굴착기 기사로서, 아내와의 ‘플라멩코’를 꿈꾸면서 미래를 기다리는 일상을 살아간다. 새로운 언어 스페인어가 만들어준 새로운 관계로의 확장은 분명히 그가 가졌던 ‘좋은 일이 생길 거야’라는 믿음을 현실화했다.

27년 전에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필사적으로 새 일을 찾아 나서서 팔다리를 끝없이 움직이는 중장비 기사로 일하면서 그는 다시 태어났다. 굴착기와의 만남을 통해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일을 통해 ‘재미’를 느꼈고, 건축의 기초에 이바지하는 일을 통해 ‘보람’을 얻었으며, 먹고사는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의 만족을 누렸고, 더 나아가 스페인 여행을 통해 ‘유희’를 즐기며 딸과의 ‘화해’를 선물받았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소중한 천직인 셈이다.

우리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세상을 살다 보면 본래의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타성에 젖어 으레 새로이 주어질 24시간을 기계적으로 기다리며 분주히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주객(主客)이 뒤바뀌고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는 삶인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야 할 100년 안팎의 삶을 마치 수많은 조작가에 의해 움직여대는 마리오네트(marionette)처럼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면 무척이나 서글픈 일일 것이다.

비록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는 각자의 주체적인 삶을 살며 주도적으로 호흡하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의도적으로라도 나의 이성과 감성의 끈으로써 자유자재 조절할 줄 아는 인생을 살아내야 의미를 득(得)할 수 있으리라. 굴착기가 아닌 ‘굴착기를 조종하는 기사’로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의지의 소유자였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내 의지대로 주행을 하는 인생의 능동적인 운전자였다.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플라멩코의 정신과도 맞물린다. 특히 ‘인간에 대한 사랑’에 기반하여 타지를 떠돌며 살고 사랑하는 집시의 정신은 주체적 플라멩코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남훈에게 ‘뜨거운 불’을 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남훈이 맞춤 의복을 갖추어 입고 스페인 세비야의 광장에서 추는 플라멩코는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환희와 쾌감의 도가니 속 희열을 맛보게 한다.

그의 그러한 주체적 DNA는 여지없이 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직업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보연은 아버지인 남훈에게 “시시해도 지금의 내 인생이 좋아.”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어떤 표정도 어떤 말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금, 누구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못 하는 일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가 그렇다. 아버지도 모르게 아버지의 스페인어 강사인 카를로스와 연애 중이었던 딸 선아의 “내 인생은 내 거라고요.”라는 외침 또한 그러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위기를 겪은 후 새로이 태어나 청년일지를 쓰며 그동안 열심히 갈아온 주인공 인생의 밭고랑과 이랑에는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존중하고 신뢰하며 제 나름대로 잘 살아온 딸들의 DNA가 심어져 성장하고 성숙된 삶으로 대물림되고 있었다.

남훈이 선택한 스페인 여행의 첫 동반자는 자신의 첫딸 보연이었다. 34년 전에 이별한 딸을 스페인 마드리드 중심지에서 또다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남훈은 그제야 딸과의 진정한 해후를 경험한다. 이국땅 거리에서 엉엉 울며 끌어안은 이방인 부녀는 그렇게 낯선 거리를 좁히고 서로의 가슴으로 진실을 느끼며 이렇게 ‘진짜 가족’이 된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만남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는 소위 ‘적당한 때’가 존재한다. 풋사과는 사과의 정체성을 지닐지라도 과일로서 본연의 단맛을 내기에는 부족하고 미흡한 존재이다. 햇살을 더 많이 받고 뿌리로 물을 빨아들이며 잎으로 호흡하는 가운데 다디달고 붉은 기운을 내뿜는 과일로 수확의 적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시기상 남훈과 보연의 만남은 아쉽게도 때늦은 만남이었지만, 남훈이 보연을 지금 만난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경험한 성숙한 눈으로 마흔 살의 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결핍의 아픔을 숙성시키며 살아온 보연도 “아빠가 지금 나타나 정말로 다행이다.”라는 유연한 고백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찰나, 촌각의 순간만으로도 뒤바뀌는 운명이 있는가 하면 영겁의 무한한 시간의 흐름에도 요지부동한 확고한 진리가 존재하는 걸 보면 함부로 규정할 수 없고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아이러니한 인생이다 싶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굴착기를 움직이며 땅을 파내고 흙을 고르는 굴착기 기사가 되어 적절한 삶의 기회를 포착하고자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노력하며 용광로처럼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남훈을 응원하고 싶다.

○ 글을 마무리하며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그 실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는 소설 속 이야기는 소설이 개연성(蓋然性) 있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어디에선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공감을 얻어내기에 충분하다. 코로나바이러스 변이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병하는 가운데 초긴장과 불안, 위축의 시대를 견디고 있는 지금의 평범한 우리 이야기기에 이 소설은 친근하게 읽힌다.

무릇 ‘글’이란 직접 대면해서 표현하지 못하는 속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특히 ‘이야기’는 들려주는 이와 듣는 이와의 교감, 소통이 중요하다. 물론 글이든 말이든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유의미성을 획득해야 그 목적이 달성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남훈이 들려주는 내면의 이야기는 그의 말과 몸짓과 기록을 통해 설득력 있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남훈이 홀로 기록했던 청년일지와 자서전이 그랬으며, 딸과 주고받는 편지와 메시지가 그러했다.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 혹은 다른 공간의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며 서로의 인생을 공유한다. 특히 서로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사이라면 그 관계의 거리를 좁힐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힘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우리는 기다림과 느긋함보다는 조급함과 재촉에 무게를 싣는 그야말로 ‘속도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독자들의 눈을 붙잡으며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이미 독자들의 취향마저 간파한 내공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라던 故 최명희 작가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당시의 풍속사를 수려한 문체와 서정성으로 엮어낸 대하소설 『혼불』을 통해 문학적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시대를 뛰어넘어 2022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대적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내기 위해 인내하는 지혜로운 ‘혼불 정신’이 절실하다.

사람이 죽기 전에 몸을 빠져나간다는 혼불의 크기는 종발만 하다지만, 가열차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혼불은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타오르기를 기원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플라멩코 추는 남자』의 주인공이 삶의 의지를 갖추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열정적으로 소통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더불어 남녀불문하고 희망을 품고서 자신의 인생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밤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므로.

 


【수상소감】 최명희 작가의 문향(文香)을 그리워하며…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음을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끈질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움츠러든 일상을 보내던 올해 초에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책을 손에 들었는데, 뒤따르는 독후감 공모전 수상 소식이 저를 무척 들뜨게 합니다.

3년 전 이맘때 즈음, 가족들과 동행하여 남원 혼불문학관에서 만났던 따스한 봄 햇살과 평화로운 정취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최명희 작가의 문향(文香)을 그리워하며 한참을 서성이던 그 날의 발걸음도 떠오릅니다.

저는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플라멩코 추는 남자」에서 변화무쌍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각자의 삶에 ‘혼불 정신’을 제 나름 녹여내며 ‘살아왔고, 살아가며, 살아갈’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 시기 또한 언젠가는 지난 과거가 되어 있기를 희망하며 ‘혼불의 메아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대상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또한, 즐겨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며 꾸준히 글을 쓰고자 노력하는 저를 자랑스러워하며 멋지게 청출어람(靑出於藍) 성장 중인 두 딸과 늘 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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