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심을 지닌 땅

언론에 비친

[독서신문 20210925]"인생살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눈물바람이니… "최명희의 『혼불』

작성자
최명희문학관
작성일
2021-09-25 11:35
조회
9777

전주에 있는 최명희 문학관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는 애매하다. 계절을 혼동한 뒤늦은 장맛비가 사흘을 쏟아부은 뒤  겨우 멈춘 9월 중순. 한낮의 햇살은 따가웠고, 저녁노을은 붉었다. 불현듯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솟구쳐 올랐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윗대로 이어진 분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캐고 싶었다’는 작가 최명희의 『혼불』이 초혼(招魂)처럼 가슴을 쳤다. 51세에 암으로 타계한 작가의 삶도 마음을 흔들었다.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울에서 중부와 호남, 순천완주 고속도를 거쳐 오수 IC에서 내려 혼불의 배경지인 남원 <혼불문학관>으로 향했다. 행정구역은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 노봉마을. 

“그다지 쾌청한 날은 아니었다”로 시작하는 『혼불』의 첫 문장과 달리 노봉마을의 하늘은 늦여름의 잔서(殘暑)와 초가을의 정취가 동시에 몸을 감쌌다. 혼불의 첫 문장이 밖의 날씨가 아니라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알려진 대로 『혼불』은 『장길산』 『임꺽정』 『지리산』 『태백산맥』 『토지』 등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대하소설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40년대 전북 남원의 유서 깊은 문중(매안 이씨)에서 청상의 몸으로 종가를 힘겹게 지키며 일으켜 세운 ‘청암부인’과 아들 이기채와 부인 ‘율촌댁’, 손자 이강모와 부인 ‘효원’ 등이 주 인물이다. 종부 3대의 이야기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가 청암부인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손자 강모와 요원, 그리고 양반가의 땅을 부치며 사는 거멍골 사람들과 중인, 상민의 신산한 삶이 축을 이룬다.

이야기의 골간인 <청암부인>을 예로 들자. “부인의 친척동네 이름이 청암이어서 시집온 그날부터 그네는 택호를 청암이라 하였다. 그네가 들어선 종가의 형상은 참담했다. 댓돌은 잡초에 묻혀있고 기와는 군데군데 떨어져나가… (중략) 거기다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져 금이 간 벽이라니. 그 삭막 황량한 집안에 혼자 앉은 청암부인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3권)

가부장제의 최대 피해자인 여성이 가부장 질서의 수호신으로 나선 역설의 배경은 갓 신행 온 손부 ‘효원’에게 건넨 얘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너도 종부가 되었으니 내 말을 잘 들어라. 대저 종가란 무엇이냐. 조상 저 윗대 아득하신 현조 이래로 그 어른의 장자에 장자로만 이어온 한 가문의 맏이 집아이 곧 종가이니라. 거기에 깃든 정신의 골격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니라”(3권) 

불과 80년 전인 엄혹한 시절, 국권을 잃었지만 여전히 봉건적 정신구조와 문화를 지탱하는 이중적 시대상황에서 몸부림치는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힘들어도 말도 못 하고 가슴에만 꾹꾹 담아둔 채 소리 내 울지도 못한 모습은 오늘의 서민 모습과 겹친다. 
  
“맷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한 가습은 일어나 앉아 보아도 술을 내쉬어 보아도 내려가지 않는다. 그 맷돌의 무거움은 가슴에 고인 신물의 무게 같기도 하고, 걸려있는 한숨의 무게 같기도 하였다” “방안을 내리 누르는 무거운 더위가 모녀의 사이에 막을 친다. 그것은 근심의 무게만큼 답답하다. 가슴이 눌린다. 그러면서 오류골댁은 미끄러지듯 잠에 빠진다. 근심은 근심대로 눈을 껌뻑이며 가슴 한편에 고여 있지만 고단한 육신은 그 근심까지 쓸어안고 잠이 드는 것이다”

혼불문학관에는 작가의 집필실과 취재수첩 육필원고 만년필 상장 및 상패는 물론 혼불 사건 연보 및 작가의 생애, 신문 연재 스크랩 등도 전시돼 있다. 특히 작가의 원고를 형상화한 디오라마가 전시돼 있어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노봉마을에는 혼불 속 배경이 되는 종가, 노봉서원, 청호저수지, 새암바위, 서도역 등 소설 속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폐역이 된 서도역은 영화 촬영장으로도 이름을 알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시인 박명용은 「서도역 한 컷처럼」이란 시에서 서도역을 이렇게 묘사한다.

“숨 끊긴 서도역은 살아있었다/한 컷의 시간들이 꿈틀대고 있었다/사람대신 찾아오는 바람이며/잔뜩 손때 묻은 대합실 문잡이이며/사랑한다는 낙서며 덜컹거리는 마무조각이며/조금은 쓸쓸한 것 같은 들꽃 몇송이이며/잡풀에 갇힌 녹슨 철길이며/덩그러니 선 기다림의 신호대며 모두가 사람의 혼불을 피우고 있었다/서도역은 숨을 쉬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도 없다”

소설의 배경지를 걷다 보면 아름다우면서도 애틋하고, 근엄하면서도 서러운 작가의 속삭임을 느낄 수 있다. 

혼불은 당시 삶은 물론 강모와 효원의 혼례, 청암부인의 장례 과정을 통해 호남지방의 혼례와 장례의식, 정월대보름 등 풍속사와 남원 지방의 방언을 정교하면서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무신 노무 인생살이 살아서도 눈물바람, 죽어서 귀신이 되야도 눈물바람. 오나가나 울고 우는 굿이구나. 기양 울어부러라 울어부러. 애껴뒀다 가뭄에 쓸라고 참겄냐? 오짐도 누고 나면 씨언허고, 눈물도 쏟고나면 개법지, 울고 자픈거 못 울면 울임에도 체험게. 허기사 머. 울라고 굿허제, 웃을라고 굿헌다냐? 에이고 시언하다. 한참을 참었네 기야”

그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구밖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의 해묵은 몸에는 이정을 알려주는 먹빛이 아직도 뚜렷하다. 어디로 가는 길 몇십리 어디로 가는 길 몇백리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은 단 한걸음도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중략)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내가 지켜야 할 마을의 이름은 무엇인가/나는 이 곳 말고는 다른 마을을 꿈꾸어 본 일이 없었으니/이곳이 곧 나의 한 세상이리라”.

청암부인의 하직은 작가의 마지막 순간과 겹친다.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청암부인은 결국 세상을 하직하는 데 며느리 인월댁과 손부 효원은 청암부인의 혼불이 떠나가는 것을 본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산소 호흡기를 쓴 채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갑니다”라고 했다. 

사실 작가는 오롯이 혼불을 쓰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작가는 전주에서 출생해 전주 기전여고를 거쳐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모교인 기존여고와 보성여고에서 국어교사로 10년간 교편을 잡는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쓰러지는 빛>이 당선됐고,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공모전에 혼불(1부)이 뽑히면서 최명희란 이름을 각인시킨다. 이어 월간 신동아에 혼불 연재를 거쳐 1996년 완결된다. 20세기 말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연기 기념비적 작품은 17년간 혼신을 바친 결과이다. 그리고 2년 뒤 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남원의 혼불 문학관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공간이라면 전주한옥마을에 자리 잡은 최명희문학관은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다. 한옥 구조로 되어있는 내부는 작가의 친필원고와 지인들과 나눈 편지와 엽서, 생전에 사용하던 펜 등이 놓여있다. 문학관에서는 문학강연이나 기행, 토론회, 세미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최명희는 고향 전주를 이렇게 표현한다. “천년이 지나도 이천년도 지나도 또 천년이 가도 끝끝내 그 이름 완산이라 부르며 꽃심 하나 깊은 자리 심어 놓은 땅” 

국어교사답게 한글 사람도 남다르다 “저는 제 고향 땅의 모국어에 의지하여 문장 하나를 세우고 그 문장 하나에 의지하여 한 세계를 세워보려고 합니다. 한없이 고단한 길이겠지만 이 길의 끝에 이르면 저는 저의 삶과 저 자신이 서로 깊은 화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문학관 뒤편 골목을 돌아가다보면 길가에 최명희 생가라고 쓰인 표지석이 있다. 혼불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그러나 실제 혼불을 보았다는 사람은 많다. “그것은 우리 몸안에 있는 불덩어리로서 모양은 둥글고 크기는 종발만 한데, 빛살없는 푸른색이며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작품은 “그 온몸에 눈물이 가득 차 오른다”란 글귀로 끝맺는다. 소설의 그 많은 인물과 이야기는 맺음이 없다. 혼란스런 시대 사람들은 합쳐지고 흩어지고 그리워하고 만나지 못한다. 꿈을 얘기하지만 이루지도 못한다. 곧 단풍이 들 것이다. 봄, 여름이 오고 지나간 것처럼 다가올 가을도 흔연히 사라질 것이다. 세상사는 늘 먹먹하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아도 세월은 그렇게 또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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